선사시대에서 신라를 넘나든 글바위, '울주천전리각석'
이상원의 이야기를 담은 풍경 (21)
반구대암각화에 이어 또 하나의 세계적인 유물, 울주천전리각석을 찾아 나섰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에 소재하며, 울주 대곡리 반구대암각화와 2.3km 떨어진 대곡천 중상류에 있는 글바위가 그것이다.
울산지역 최초의 국보이자 암각화 유적 최초의 국보를 떨리는 마음으로 마주했다. 동쪽으로 향한 너비 9.5m, 높이 2.7m의 큰 바위가 윗부분이 15도가량 앞으로 기울어져 있어 건너편 높은 바위 절벽 위로 떠오른 해가 바위를 비추는 오전의 짧은 시간에만 바위 밑부분의 가는 선 그림(세선화)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하루 중 대부분은 그늘에 있어 자연 풍화를 늦출 수 있었다. 오전 시간대에 수 차례 이곳을 찾아 관찰하고, 사진을 찍었다. 아주 긴 삼각대로 카메라 위치를 높게 하여 암각화 앞에 있는 보호 울타리가 나오지 않게 바위 전면의 사진과 망원렌즈로 신라시대 명문을 촬영하고, 천전리각석 주변 계곡과 건너편 바위의 공룡발자국 화석 사진도 찍었다. 찾아갈수록, 공부를 하면 할수록 그 유물이 대단하게 여겨졌고, 하나씩 더 보이기 시작했다. 내 사진의 내용도 달라졌다. 역시 문화재는 관광이 아니라 공부의 대상이었다.
천전리각석은 당시 29세의 젊은 사학자 문명대 교수가 단장이었던 동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이 불교유적을 조사하던 중 집청전 주인 고 최경환 옹의 제보로 1970년 12월 24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이다. 이것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학계에 ‘암각화(岩刻畵)’라는 새로운 연구 분야가 개척되었다.
한국일보 1971년 1월 1일자에 천전리각석 발견 기사가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밀어내고 1면 머리기사를 차지했다. ‘최고(最古)의 화랑유적 발견’이라는 제목 아래 ‘울주군 언양면 반구동 절골산서 선각대벽화·금석문 확인. 천사백년 풍상을 견뎌온 최고(最古)의 벽화…’라고 보도했다.
천전리각석은 바위 중간에 선을 그었을 때 위쪽은 선사인들의 그림이 다수 차지하고, 중간과 아래쪽은 신라인들의 그림과 글씨가 있다. 이 바위엔 세 단계에 걸쳐 암각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처음 새겨진 것은 주로 사슴, 노루, 개와 늑대, 표범, 호랑이 등 네발짐승들이었다.
두 번째 암각은 오랜 세월이 흐르고 이 바위를 찾은 새로운 사람들에 의해 깊은 선 쪼기에 이어갈아내기로 새긴 선각 기하학 문양이다. 세 번째 이 바위를 찾은 신라시대 사람들은 날카로운 금속도구를 이용하여 말과 사람, 배, 새, 용, 연못 등을 선 긋기 그림(細線畵)으로 남겼다. 또한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이 골짜기를 찾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름과 방문 이유를 바위에 한자로 새겨 남기기 시작했다. 많은 명문(銘文) 중 을사(乙巳, 525년)과 기미(己未, 539년)년에 신라 왕족의 행차 사실을 기록한 300여자의 글씨가 가장 주목을 받고 있다.
오른쪽 부분은 먼저 새겨졌다고 해서 ‘원명(原銘)’, 왼쪽 부분은 나중에 추가로 새겨졌다고 해서 ‘추명(追銘)’이라고 부른다. 새겨진 시기는 다르지만 두 명문에 등장하는 인물과 이야기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원명은 을사년(525년) 6월 18일 새벽에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이 누이인 어사추어랑왕과 함께 놀러와 골짜기 이름을 서석곡(書石谷)이라 짓고 글씨를 새기게 했다는 내용의 명문이다. 사부지갈문왕은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이었다.
원명이 새겨진 뒤 14년이 지난 기미년(539년)에 추명(追銘)이 새겨졌다. 사부지(입종)갈문왕과 어사추어랑왕이 세상을 떠난 뒤 이들을 그리워하며 기리는 마음으로 찾아온 지몰시혜비(只沒尸兮妃), 부걸지비, 심맥부지(삼맥종) 일행이 남긴 명문이다. 지몰시혜비는 사부지갈문왕의 왕비인 지소부인이고, 부걸지비는 법흥왕의 왕비이자 지몰시혜비의 어머니인 보도부인이다. 왕자 심맥부지(삼맥종)은 사부지갈문왕과 지몰시혜비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 이듬해(540년) 7세의 나이에 즉위한 진흥왕이다. 지몰시혜비는 법흥왕의 딸이자 사부지갈문왕의 조카로, 사부지갈문왕은 조카와 결혼을 한 것이다. 역사에서 왕족 사이에 순수 혈통 보존과 왕권 강화를 위해 성행했던 근친혼 사례를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진흥왕이 어릴 때 이곳을 찾아 바위에 글을 새긴 경험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서울 북한산, 함경도 원산의 마운령과 황초령에 진흥왕 순수비(巡狩碑), 경남 창녕에 진흥왕 척경비(拓境碑)를 세우게 하였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3명이나 있었다’, ‘여성이 자기 재산을 관리 처분할 수 있었다’, ‘여성이 정치 사회 종교 등 공적인 활동을 활발히 했다’는 점 등을 들어 신라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러나 천전리각석의 명문(원명, 추명)의 여성에 대한 기재 방식은 남편을 먼저 기록하면서 ‘OO妻(婦) ㅁㅁ夫人’으로 표기하고 있어 신라는 엄격한 가부장제, 남성중심사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천전리각석에 남아 있는 연대가 표시된 명문 가운데 가장 이른 것은 삼국시대인 453년(눌지마립간 37년, 계사명) 새겨진 것이고, 제일 늦은 것은 통일신라 시기인 838년(민애왕 원년, 개성명) 새겨진 것이다. 두 시점 사이에 신라의 왕족, 귀족, 승려, 화랑들이 자주 이곳을 찾아와 오늘날 방명록을 쓰듯이 그들의 서석곡에 온 사연과 기념할만한 내용들을 바위에 새겼다. 그 가운데 화랑이 20여 명으로 가장 많은데, 문무대왕의 화랑 시절 이름인 법민랑(法民郞)이란 글씨도 남아 있다. 이곳이 화랑의 심신수련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이 찾아와 바위 아래쪽에 짧게 선을 그어 신성한 바위에 소원을 빈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세계 어디서나 행해진 바위신앙이 신라에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천전리각석에 남은 수많은 명문 중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같은 기존 사서에 없는 기록이 여럿 보여 역사기록으로서의 가치도 높다고 한다. 역사기록으로 전하지 않은 사건들 외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이름이나 관명, 직명, 지명 등이 등장해 신라의 정치사회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천전리각석은 주암면과 바로 옆 3개의 암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2014년 울산대학교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의 실측 결과에 따르면 전체 물상의 수는 773개이고, 주암면에 696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시대 명문은 253개(32%), 점각 동물상 224개(29%), 선각 기하문 91개(12%), 선각 및 세선각 인물상 61개(8%), 도구와 건조물 22개(3%), 자연물 16개(2%), 파악미상물 106개(14%)로 분류 되었다. 눈으로 보면 깊고 굵게 새긴 기하문양이 주로 보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물상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기하문은 점, 선, 네모, 세모, 동심원, 마름모꼴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기하문양이 천전리각석 상부에 가득 채워져 있다. 천전리각석의 암각화에서 깊게 갈아낸 선각으로 새긴 기하문은 마름모 모양이 41개로 가장 많고, 동그라미 모양이 29개, 물결 모양이 10개이다. 그 문양들은 청동기시대 농경과 관련해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종교적 상징으로 학계에서 풀이하고 있다.
세계의 수많은 암각화 유적 중에서 천전리각석의 기하문처럼 중점적으로 규모 있게 나타나는 곳은 그 유례가 없고, 내용의 충실성, 조형적 완성도에서 세계 유수의 독보적인 기하문 암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외 천전리각석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가장 주목할만한 것으로 선사시대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 바위를 찾아와 그들의 생각, 관점과 신앙을 암각화라는 형식으로 바위에 남긴 뒤 수천 년 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그것이 선사시대에 그림이 새겨진 뒤 잊혀진 반구대암각화와 차별되는 점이다. 또 선사에서 역사까지 수천 년 동안 여러 시대의 작품이 하나의 바위 화면에 모여 있는, 국내외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유적이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천전리각석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걸친 긴 세월 동안 인간의 미적 감각과 표현이 어떻게 바뀌어나가는지를 읽어내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선사시대와 고대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래서 천전리각석을 ‘여러 시대를 설명해줄 수 있는 현장 역사 교과서’, ‘천혜의 박물관’이라고도 한다.
암각화 앞에는 100여 명이 둘러앉을 수 있는 넓은 반석이 펼쳐져 있고, 그 반석 위에는 약 1억 년 전 백악기 공룡발자국 화석이 200여 개 남아 있어 대곡천 일대가 공룡의 집단 서식지였음을 알 수 있다. 울산 지역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 화석 17곳 중 11곳이 대곡천 암각화 일원에 분포하며, 확인된 공룡 발자국의 95% 이상이 초식 공룡의 발자국이다.
1억 년 전 공룡의 발자국 화석과 선사시대 암각화, 역사시대 명문이 함께 존재하는 유적이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다고 하는데, 의외로 이 유적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지 않고, 찾는 사람도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 세계적인 유적을 가까이 두고도 오래 전 한번 들러 슬쩍 보고 나서 까맣게 잊고 있었고, 그 가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했다. 수차례 답사와 여러 자료를 공부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바위 유적 하나가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주고, 수천 년 뒤 우리에게 기하문을 비롯한 많은 추상적인 물상에 대한 해석과 이야기를 읽어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동안 다방면에 걸쳐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여전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와 맞추지 못한 퍼즐이 많이 남아있다.
2022년 9월 태풍 힌남노 때 천전리각석 주변 보호 울타리와 <울주천전리각석>, <천전리각석 명문 해설> 안내판이 파손되어 철거되었는데, 울타리는 금년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안내판은 아직도 설치되지 않고 있다. 그곳에서 만난 문화관광해설사 한 분은 지난 번 100mm 이상의 많은 비가 쏟아졌을 때 위쪽에서 빗물이 암각화를 타고 내리는 걸 보고 안타까웠다고 했다. 천전리각석 바위 위에 무성한 나무의 뿌리가 바위에 균열을 일으키지는 않을지도 의문이다. 천전리각석으로 가는 대곡천에 놓인 작은 다리는 홍수 때는 물에 잠기고, 사람이 오갈 수 없어 문화재는 고립되게 된다. 국보로 지정된 후에도 바위에 낙서가 남겨졌다. 성숙된 시민의식과 함께 효율적인 관리가 필요함을 말해준다.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을 포함한 암각화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라는 과제를 눈앞에 두고 있다. 등재를 위해 두 유적에 대한 우수성을 학문적으로 밝혀 널리 알려야 하고, 더 시급한 것은 확실한 보존 관리 대책일 것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서둘러 안 한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와서도 안 될 것이다.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를 이어주는 숲속 길을 걸었다. 조금 가파른 곳도 있었으나 걷기에 편하게 길이 잘 다듬어져 있었다. 아득한 옛날 공룡의 무리가 주인이었을 대곡천은 여전히 기암괴석을 품에 안은 채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그 맑은 물가 어딘가에서 사슴과 노루가 귀를 쫑긋 세우며 물을 마시고 있을 것 같았다. 선사시대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라면 하루 생활 반경이 20km는 되었을 텐데……내가 걷는 그 숲도 그들의 주된 생활터전이었을 것이다. 큰 나무 뒤에서 숨죽이고 기다렸다가 야생동물 사냥하고, 때론 맹수를 만나 목숨을 잃거나 다치기도 했을 그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계곡의 물소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여러 종류의 새소리가 마음을 평온하게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힐링을 하기에 충분했다.
반구대를 중심으로 반구대암각화와 천전리각석, 두 문화재를 이어주는 대곡천과 주변의 계곡 그리고 북쪽의 대곡댐과 남쪽의 사연댐을 아우르는 지역은 문화재와 상수원 보호구역이어서 개발이 극히 제한되어 있어 청정한 환경을 유지하고 있다.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풍광이 즐비하다. 이렇게 잘 보존된 환경을 활용해서 다양한 둘레길을 만들고, 역사와 문화, 인문학을 포함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명상과 휴양을 할 수 있는 환경친화적인 힐링 시설을 만들어 국내뿐 아니라 세계의 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하면 좋겠다.
유럽 여행을 하게 되면 흔히 관광코스로 여러 성당과 박물관을 방문해 유명 예술가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보곤 한다. 아름다운 대곡천에 있는 두 바위를 캔버스로 삼아 수천 년 동안 이 땅의 이름없는 예술가, 민초가 일상과 염원을 담아 새긴 바위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알고 보면 그것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명화이자 조각 작품이 아니던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주위의 풍광을 느긋하게 즐기며, 천전리각석과 반구대암각화를 찾는다면 세계 유명관광지에서 인파로 밀리듯 보게 되는 소위 ‘명화(名畵)’에서 느끼지 못하는 새로운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 수천 년 전 대곡천에서 뛰어놀다가 바위벽에 몸을 숨긴 사슴이 지금도 세상의 소리를 엿들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