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산적'…[14] 태화산(75)

2024-04-21     김태환
삽화. ⓒ장세련

특히나 우족이나 돼지족발을 다루는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다. 돼지족발을 다룰 때는 불을 피워 털을 태운 다음 칼로 긁어내는 게 보통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곱 치 칼 한 자루로 털을 깨끗이 잘라낸 다음 뼈와 뼈 사이의 힘줄을 모두 발라내었다. 족발을 들고 작업을 하는 동작이 다람쥐가 알밤을 들고 놀리는 듯했다. 

 사람들은 예전에 동네에서 사라졌던 임영복이란 사내가 되돌아와서 사는 걸로 착각하는 때도 있었다. 밤마다 각동 강변에 나가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 그런 착각에 빠질 만했다. 

 임영복이 영월에 온 뒤 사흘 뒤에 각동마을에는 큰 잔치가 벌어졌다. 마을이 생긴 이래 유례없는 잔치였다. 영월 군수가 사람을 보내 잔치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마침 그날이 영춘 장날이었는데 장꾼들을 모두 각동으로 불러올렸다. 각동 강변에 난데없는 오일장이 열렸다. 특별히 영월 군수가 황소를 두 마리 보내 임시로 열린 장터에 모인 사람들을 먹도록 했다. 장꾼들은 때 아닌 잔치에 모두가 흥이 났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있구먼. 영월 군수가 왜 우리 같은 장꾼들에게 소를 잡아 먹인대?"

 "이 사람 깜깜무소식이구먼. 여기 각동에서 큰 인물이 났다잖아. 뭐라더라 의금부도사가 나왔다더구먼."

 "그게 참말인가? 도대체 이런 촌구석에 어느 집안에서 인물이 나왔대?"

 "두고 보면 알겠지. 아마 좀 있으면 여기 나올 거라는데."

 "그런가. 저쪽에 저건 또 뭐래? 안 보이던 남사당패들도 다 찾아왔구먼."

 아닌 게 아니라 갑자기 들어선 각동장에는 영춘장이나 하동장에서 볼 수 없었던 장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장마다 따라다니던 각설이패 대신에 인원이 스무 명이 넘는 남사당패가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영월 군수의 명령으로 잔치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각지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각동마을의 소백정은 환갑이 다가온 나이에 갑작스러운 호사를 누렸다. 부부는 영월 군수가 보내온 명주로 새 옷을 지어 입고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각동 강변의 잔치 마당으로 갔다. 버드나무 그늘에 임시로 만들어 놓은 단 위로 올라가 상석에 앉았다. 

 잠시 후에 풍악 소리가 울리며 만장을 든 행렬이 장터로 들어섰다. 장꾼들은 물론이고 인근 마을에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단 앞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단 앞에 다섯 대의 가마가 도착했다.  맨 앞쪽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영월 군수였다. 뒤에서 임영복과 그 식솔들이 가마에서 내렸다.

 각동마을 사람들은 가마에서 내린 임영복을 보고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예전에 임영복의 또래였던 사람들은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소백정의 아들이라고 사람 취급도 안 해주던 임영복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게 그 바보 영복이가 맞는가?"

 "난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모두가 술렁거리는 가운데도 사지를 부들부들 떠는 노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성영의 아버지인 조영환이었다. 딸의 결혼을 반대하다가 딸은 물론이고 마누라까지 황천길로 보낸 조영환이었다. 그날부터 후회의 나날을 보냈지만 이렇게 세상이 변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끓어오르는 부아를 조금만 참았더라면 오늘 저 무대 위에 본때 있게 앉아있을 걸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를 둘러싼 사람 중에는 조영환 말고도 남다른 눈길로 무대 위의 임영복을 쏘아보고 있는 무리가 있었다. 바로 이선달이었다. 이선달은 새아버지처럼 모시는 소백정이 새 옷을 지어 입고 호사를 할 동안에도 일부러 거리를 두며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영춘에서 한의원을 하는 털보와 털보의 아내 풍기 댁이었다. 털보는 임영복이 가마에서 내릴 때부터 긴장하기 시작했다. 십 년 전에 자신의 콧대를 주저앉힌 장본인이 바로 임영복이었다. 그 길로 자신의 산적생활도 끝이 나긴 했었다. 털보는 이선달과 의미 있는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무릎이 부서진 이선달을 살려낸 것은 순전히 털보의 의술 덕분이었다.

 산적생활을 청산하고 약초꾼이 되었다가 영춘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자도 나와 있었다. 남한강에서 떼꾼이 된 산 사람도 마침 각동을 지나다가 떼를 세우고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관복을 입고 나타난 임영복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 떼죽음을 당한 순흥 사람들에 비하면 그래도 자신들은 나은 셈이었다. 임영복이 목숨만은 살려 준 것이 고마워해야 할 일인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 고을을 무참히 살육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놈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제일 놀란 것은 주막집 주모 풍기 댁이었다. 순흥이 살육되기 시작하던 날의 기억은 두고두고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깬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경군이 마구령을 넘어와 주막에 들러 수임 중이었던 소운과 임장호를 무참히 살육하던 광경을 고스란히 목격한 풍기 댁이었다. 자신은 꾀를 부려 대장 놈에게 몸을 주고 간신히 호구에서 벗어났었다.

 그런데 순흥 사람이 죽어 나가던 때 그곳에 가 있던 딸의 행방을 지금까지 모르고 살았다. 뒤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청다리 아래에서 목을 잘린 사람이 수백 명이 넘는다 하니 그중에 섞여 한군데 떼무덤에 묻혔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윤미가 대군의 시녀로 있었다 하니 잡혀 죽었을 가능성은 더 높았다. 

 "누님에게 내가 죽을죄를 졌소."

 이선달이 만나기만 하면 하는 소리지만 풍기 댁은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다. 이선달이 순흥으로 데려가지 않았어도 어차피 마구령을 넘어 온 경군에 잡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단상 위를 쳐다보는 풍기 댁의 눈이 점점 벌어졌다. 눈을 비비고 바라보아도 윤미였다.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풍기 댁은 곁에 있는 이선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동상. 저기 있는 저 애가 우리 윤미가 맞지?"

 이선달도 아까부터 윤미를 유심히 살펴보던 중이었다. 모습은 예전의 윤미가 분명한데 설마 하며 바라보던 중이었다.

 "저도 아까부터 보고 있었습니다. 윤미와 너무 닮았군요."

 "닮은 게 아니라 분명 우리 윤미야. 윤미."

 풍기 댁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껴 울었다. 김태환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