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산적'…[14] 태화산(76)
임영복이 자신의 부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윤미와 아이들에게도 절을 올리게 했다. 각동 강변의 돌을 짊어지고 떠나간 지 꼭 이십 년이 흘렀다. 멀리 각동 강변 건너편의 뼝대바우를 쳐다보았다.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다. 발아래 도열해 있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성영의 아버지 조영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꾀죄죄한 옷차림에 거지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딸과 아내가 죽고 나서 새장가는 엄두도 못 내고 홀아비로 지내니 사람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임영복은 조영환을 무대 위로 불러올렸다. 임영복 앞에 선 조영환은 두 다리를 사시나무 떨듯이 후들후들 떨었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았다.
"어르신. 저 영복이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알다마다요.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나리."
조영환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임영복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허허. 어르신 그러시지 마세요. 여기 자리에 앉으시지요."
임영복은 조영환을 자신의 새아버지 소백정의 옆에 앉도록 했다. 각동마을 사람들은 조영환과 임영복과의 얽힌 이야기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더러는 뼝대바우에서 뛰어내린 성영 모녀를 생각해내고 강 건너편을 바라보기도 했다.
단상 위에 있던 윤미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여인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바로 자신이 어린 시절 그토록 흠모했던 이선달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흐느끼고 있는 여인은….
윤미는 어린아이들을 내버려 두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먼저 이선달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맞죠?"
이선달이 가까이서 바라보니 틀림없는 윤미였다. 예전의 목소리까지 그대로였다.
"아이고. 윤미야. 네가 살아있었구나."
이선달이 윤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울고 있던 여인이 윤미를 와락 껴안았다.
"아이고. 이 몹쓸 것아. 에미를 놔두고 어디에 가 있었던 것이냐?"
두 모녀는 꼭 십일 년 만에 재회했다. 단상 위에 있던 임영복이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십 년을 부부로 살아오면서도 순흥과 연관된 이야기는 절대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했었다. 장모가 되어 나타난 여인을 보니 예전에 경군을 데리고 마구령을 넘었을 때 주막집 주모였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 옆을 보니 털보가 풍기 댁 옆에 서 있었다. 여전히 큰 덩치에 수염을 길게 기른 모습이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또 그 옆에는 이선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옆에 예전에 마구령에서 산적 노릇을 하던 자들이 몇몇 눈에 띄었다.
"이놈들! 마구령 삵괭이 놈들이 여기 나타났구나.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나타난 것이냐?"
제 어미를 끌어안고 울던 윤미가 고함소리에 놀라 임영복을 쳐다보았다.
"여보! 이분은 우리 어머님이세요."
당장 산 사람들을 잡아 오라 지을 것 같던 임영복이 긴장을 풀었다. 단상까지 내려와 풍기 댁을 단상 위로 데리고 갔다. 임영복이 풍기 댁을 자신의 어머니 옆에 앉히려 했다.
"우리 서방님도 같이 앉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동상도."
"그렇게 하시어요."
윤미도 제 어미를 거들었다. 임영복이 하는 수 없이 털보와 이선달을 단 위로 불러올렸다. 임영복은 절름거리며 위로 올라오는 이선달을 바라보고 빙긋이 웃었다. 임영복은 장인장모인 풍기 댁과 털보에게 절을 올렸다. 절을 마치자 소백정이 임영복에게 한마디 했다.
"인사를 하거라. 이 사람은 이름이 노각수인데 십 년 동안 우리 집에서 아들 노릇을 톡톡히 해주었단다."
"노각수라고요? 노각수라면 조선 제일의 살수가 아닙니까? 하하하핫!"
임영복은 강 건너 뼝대바우가 울리도록 큰소리로 웃어 재꼈다.
"기억하고 있구나. 예전에 마구령에서는 네가 노각수였지만 오늘은 내가 노각수가 되었구나. 예전에 내가 한 말을 잊지는 않았겠지?"
"하릅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아직도 조선 제일의 살수는 의금부도사 임영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게냐?"
"네놈 원대로 사대문 안에서 갓을 쓰고 다니기는 하는구나. 오늘이 바로 예전에 얘기했던 보름이다. 피할 생각은 하지 말아라."
"아, 좋구나. 이곳은 내가 뼈를 굳힌 각동 돌밭이 아니더냐. 참으로 좋은 장소를 골랐다. 지금은 잔치 중이니 실컷 먹고 마신 다음 밤에 보름달이 뜨면 단둘이 만나자꾸나. 하하하 이렇게 즐거울 수가. 이 주먹으로 바윗돌을 부수어 본 지도 꽤 되었구나. 하하하."
그때였다. 강 위쪽에서 지축을 울리는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먼지를 일으키며 단 앞에서 말을 세운 사람은 영월 관아의 포졸이었다.
"나리 큰일 났습니다. 전하께서…."
포졸은 숨을 몰아쉬느라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영월 군수가 냅다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냐? 냉큼 알아듣게 말하지 못할까!"
"전하께서 승하하셨다 합니다.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영월 군수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벌어졌다. 놀란 것은 영월 군수만이 아니었다. 단 위에 있던 사람이나 아래에 있던 사람이나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으하하하하. 세상에 이런 일도 있구나. 천 년을 살 것 같더니 결국은. 하하하하."
호탕한 이선달의 웃음소리에 단 아래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형제와 조카를 잡아 죽이고 찬탈한 왕위를 놓아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그러게. 저승길이 심심하지는 않겠네. 먼저 죽은 원혼들이 눈을 부릅뜨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 김태환작가 (월·수·금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