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군주 다비드 4세의 부국강병 염원 깃든 곳
[주말ON-감마르조바, 조지아] 9. 쿠타이시의 성당과 수도원
이메리티(Imeretis) 주의 주도인 쿠타이시, 이곳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전에는 조지아의 제2 공업도시로 자동차 공장 등으로 인구 약 14만 명의 큰 도시였다. 특히, 975년부터 1122년까지 조지아 왕국의 수도였을 만큼 유서 또한 깊다.
수도 트빌리시에서 서쪽으로 약 221km 거리에 있으며, 공항과 철도가 이어져서 교통 또한 편리하다. 이곳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Bagrati Cathedral)은 조지아 왕국의 바그라트 3세가 11세기에 지은 것으로 가장 대표적인 랜드마크다.
곳곳서 들려오는 한국어와 도로 위 한국 자동차
조금 일찍 도착한 터라 시내 구경 겸 시장에 들렀다. 담배를 낱개로 파는 노파에서부터 각종 채소를 길거리에 내놓고 흥정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이곳에서 한국 사람임을 잊고 현지 주민처럼 금방 동화되었다.
과일 가게에서 빨간 체리 한 봉지랑 뿌리(빵)를 샀다. 치즈가 듬뿍 들어간 빵은 많이 짰지만 쫀득하고 맛은 일품이었다. 한 입 베어 물며 리오니강을 건너는데 젊은 여학생이 "안녕하세요"라며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깜짝 놀라며 "반갑습니다" 답을 하니 너무 좋아했다. 한국 사람임을 단번에 알아본 것도 놀랐지만, 우리말로 인사를 하는 친구를 보며 우리나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어 뿌듯했다.
도로 위 수많은 차 중 약 10%는 한국 차가 달리고 있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도 한국의 선진국을 부러워하고 동경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오르막길을 따라 오르다가 숨이 벅찬 그즈음 벽에 글씨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우리나라 관광객이 썼는지 아니면 이곳 사람이 썼는지 모르겠지만, "사랑해!"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이들이 사랑으로 사는 평화의 시대를 기대해 보았다.
소규모로 치르는 우리와 다른 결혼식 풍습
우키메리오니 언덕에 있는 바그라티 대성당에 들어갔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가 너무 과한 복원으로 기존의 모습에서 변모되어 그만 제외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그래도 여기 사람들의 정신적 의지처 같은 곳이다. 이 나라의 건축 기술을 상징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마침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러 온 신혼부부 한 쌍과 친구들을 만났다. 이 나라의 결혼 풍습은 우리의 화려한 결혼식과는 전혀 다르다.
양가 부모님은 오지 않고 부부와 각자의 몇몇 친구만 모여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축복의 말씀을 듣는 게 전부다. 축하객들은 모두 손에 작은 촛불을 들고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 간절히 기원을 했다. 하객 친구 중 한 명이 마침 내게도 촛불을 건네주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 쥐고 함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오래도록 서로 마주 보며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면서….
일주일째 날이 흐리고 계속 비가 오더니 오랜만에 갠 날씨로 푸른 하늘이 더욱 청명하다. 하얀 뭉게구름이 커다란 종탑 위에 걸려 마치 그림처럼 명징하고 성스럽다.
성당 반대편에 앉았다. 도시 전체가 평온하게 다 내려다보인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개들이 돌아다닌다. 구속이 없는 자유가 이곳에 있다, 조그마한 컵에 오롯이 괸 따뜻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나는 홀로 마음이 푸른 나뭇잎처럼 짙어진다. 모두가 이 도시는 그저 지나가는 중간 기착지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공기와 하늘과 사람이 맛깔스럽게 조화로운 삼위일체다.
허리에 칼 차고 판두리 연주에 맞춰 노래하는 이들
뜰을 거니는데 조지아 전통 복장을 한 이가 나의 손목을 잡아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교회 앞에서 자기들이 연주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가니 세 명의 악사가 웃으며 "감마르조바!(반갑습니다!)"라며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몇 사람이 나처럼 이끌리어 그들 앞에 섰다. 조금 후 공연을 했다.
한 사람은 '판두리'라고 하는 전통 악기(세 줄로 기타와 비슷)로 연주하고, 두 사람은 허리에 칼을 찬 채 노래를 불렀다. 나는 빠른 박자에 손뼉을 치며 노래에 함께 흥겨워했다. 목소리는 조금 허스키하면서 우스꽝스럽고 듣기는 불편했지만, 끝까지 부르는 성의와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애정이 고마웠다.
연주가 끝나고 모두 돌아서려는 데 조금 전에 손을 잡아끌던 이가 모자를 갖고 온다. 아하! 공짜가 세상에 없구나. 한참이나 속으로 웃었다. 속은 것 같기도 하여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쩌랴. 조지아 돈 5라리를 넣자 금방 환한 웃음을 띤다.
이튿날 이곳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겔라티 수도원으로 향했다. 할머니들이 입구에서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오밀조밀한 소품을 진열해 놓고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살 만할 게 없다. 그냥 애써 시선을 멀리 두고 얼른 교회로 들어갔다.
이곳 수도원 또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을 만큼 유서가 깊다. 12세기 초반에 조지아를 통일한 다비드 4세가 지은 것으로, 조지아 정교회의 대표적인 수도원이다. 그는 이 수도원을 건설할 때 매일 현장에 나가서 감독을 할 정도로 열성을 다했지만,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약 5년 후인 1130년에 완공됐으니 정말 대단한 정성 아닌가 싶다.
독립 후 수도원 복구작업 아직 진행 중
이 수도원 또한 수많은 외세의 침략에 무너지고 파괴되면서 폐쇄되었다가, 러시아로부터 독립된 이후 다시 복구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옛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건물 외벽에는 공사 자재가 흩어져 있고 삭막한 기운이 맴돌고 있어 조금은 안타까웠다.
계단을 올라 난간에 서니 저 멀리 산 중턱으로 조그마한 집들이 풍경에 덧칠한 듯이 포도알처럼 오밀조밀 박혀있다. 여행은 그저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것만으로 머물면 재미가 없다. 공간의 이동을 통한 나의 위치 변화가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역사와 소통하며 자신의 재발견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가치창조가 아니겠나.
다비드 4세(1073 ~ 1125), 그는 조지아의 위대한 왕이었다. 그가 태어나던 때에는 지금의 튀르키예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고 풍전등화의 시기였다. 그즈음 아버지 게오르기 2세는 1089년 쿠데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곧바로 그가 16세에 왕위에 추대됐다.
왕에 오른 다비드는 왕권 강화, 제도 정비, 교육과 문화 등에 엄청난 개혁을 단행했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페르시아군을 물리치고 빼앗겼던 국토 복원뿐만 아니라,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이후 부국강병을 바탕으로 지금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및 튀르키예의 일부까지 영토가 넓어졌으며, 이민족에게도 농토를 균등 분배함으로써 지위를 확고히 다지는 계기로 삼았다.
우리나라의 광개토대왕, 아니면 정조 임금 정도로 떠올리면 금방 이해가 될 듯싶다. 그의 통치술을 통해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으며, 훌륭한 인재 발굴을 위해 이곳 겔라티 수도원에 부속 ㅜ왕립학교를 세우기까지 했다. 조지아의 부흥은 이때가 가장 전성기였다고 한다.
서울과 닮은 기운생동의 아침 풍경
많은 사람은 쿠타이시를 중간 기착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냥 간다. 그러나 이곳은 사람들의 눈빛을 보면 안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여느 도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꼈다. 활기찬 기운생동의 아침 풍경은 서울과 비슷했다.
시장이든, 상점이든 주인은 모두가 상냥한 웃음과 친절함으로 고객을 응대하고 있다. 조지아의 미래는 분명 다비드 4세 때처럼 부흥할 것을 저들은 분명 바라고 있을 것이다.
비록 지금은 자립의 시간이 조금 더딜지라도 확고한 신념과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한 머잖아 세계 속의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듯하다. 맑은 눈빛의 표정에서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여정은 시간의 제약과 일정의 계획으로 인해 한정적인 게 아쉽다. 조금더 머물고 싶어도 남은 일정이 또 다른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위로해 본다.
비록 흙탕물이지만 저 흐르는 강은 흑해로 흘러간다. 조금도 멈춤이 없는 저 출렁거리는 물살, 다리 난간에 서서 오래도록 물살에 마음을 얹었다. 꽤 유속이 빠르다. 저 물이 흑해에 가 닿을 즈음이면 나는 또 어느 도시에서 서성거리고 있을까. 어제 남겨둔 체리를 입에 넣으며 나는 물결처럼 도시를 빠져나와 먼 여정의 길을 나섰다. 어제처럼 푸른 하늘이 왜 이렇게 고마운가! 감사한 마음을 담아 창을 열고 큰 소리로 외쳤다. "베드니어에리 바!(나는 행복해!)" 이서원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