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까지 시계탑거리 못지않았던 서울주의 한 축

[주말ON-정은영의 新 다방열전] 38. 여우다방과 언양 다방들(1)

2024-10-24     정은영
삽화. ⓒ왕생이

울주 서부지역 5개 읍면 경제 중심지 언양
언양은 울산과 부산 경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에 있다. 도로망의 편리로 한때는 울산 도심만큼 통행량이 많았던 곳이기도 하다. 2010년 11월 1일 개통한 KTX 울산역(통도사 역)은 개통과 더불어 전국 5대 역으로 부상했다. 

 KTX 울산역(통도사 역)은 밀양과 양산사람들까지 언양 와서 신발에 흙을 묻힌다고 한다. 이 역을 이용하면 영남알프스 일대와 통도사 등을 관광하는데 매우 편리한 여건이다. 특히 간월산자락에서 해마다 가을이면 산악영화제가 열리고 있다. 해가 갈수록 울산 울주 산악영화제는 국내외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덕분에 언양지역 숙박업소들을 비롯해 한우 불고기 등 먹거리들이 명성을 얻고 있다. 휴양도시로 발전하는 언양은 여관 등 숙박업소, 음식점들이 같은 규모의 도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다. 특히 언양 석쇠불고기는 '언양 떡갈비'로 명품화됐다. 

 언양 사람들에 의하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다방과 술집, 당구장 등 유흥시설이 울산 시계탑거리에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언양은 울주 서부지역 5개 읍면 경제권 중심이다. 전통 오일장 언양 장은 알프스시장으로 명칭을 바꾸고 거의 상설시장처럼 장이 열리고 있지만 오일장은 울산·경주·밀양·양산사람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장날은 발 디딜 틈 없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언양을 울산 언양인데도 울산 언양이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이유는 여럿이다. 그중 하나가 울산과 언양 간에는 울산-언양 고속도로가 있다. 그만큼 거리감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울산 원도심 사람들과 다른 점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당장 발음부터 다르다. 언양 사람들은 "쌀"을 "살"이라고 발음한다. "쌀" 해보라고 해도 여전히 "살"이다. 발음만으로 보면 과거 울산과 언양은 다른 생활권역이다. 

 이들 지역 사람들은 가지산 정기를 받았다고 한다. 대신 울산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지역에서 가까운 무룡산, 문수산, 함월산 등의 정기를 받았다고 한다. 언양 사람들은 영남 알프스라는 거대한 산군의 주봉인 가지산 아래 살아서 그런지 '언양 사람'이라는 자존심이 강하다. 여기까지가 언양의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다. 

2017년 11월 1일 폐쇄된 구 언양시외버스터미널(2023년). 정은영 제공

구 시외버스터미널 일대 6∼7곳 문화예술의 산실
1970년대 중반 물론 그 이전과 이후에도 다방은 청소년 출입 금지구역이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청소년 출입이 금지된 공간이 다방이었다. 휴일이면 학교마다 교외지도반 선생님들이 도심 음악다방 등을 돌며 단속했다. 가발을 쓰고, 청바지를 입고 음악다방에 앉아 점잖게 음악을 듣던 별난 청소년들이 교외지도반 선생님들을 만나면 순식간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튀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문밖에서 학생들이 튀어나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그물을 친 선생님들에게 붙잡힌 학생들은 그날부터 한동안 반성문을 써야 했다. 최소한 보름 정도를 썼다는 경우가 많다. 

 반성문을 많이 쓴 학생들은 훗날 시인이 됐다는 말도 지금은 전설이 됐다. 그래서 다방 이야기를 시작하면 문인들이 먼저 나선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필자가 울산문협 회장 시절 계간지 '울산문학'에 과거 선배들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실었다. 선배 문인들에게 특집으로 원고청탁을 하면 십중팔구는 다방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그만큼 다방은 예술과 떨어질 수 없는 찰떡궁합이었다.

 원로 문인들은 1970년대와 80년대, 다방이 없었다면 문학과 예술이 탄생할 공간이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마땅히 갈 곳 없던 시절, 원도심에 나오면 어느 시인은 어느 다방, 어느 화가는 어느 다방, 각자 갈 곳이 정해져 있었다. 다방이 예술인에게는 창작의 산실이었다. 온종일 담배를 피우며 고심한 생각들이 시로, 그림으로 탄생 됐다고 보면 된다.

언양 알프스시장 장날 모습. 정은영 제공

대마초파동에 울산도심 다방 하나둘 문닫았지만
지난해 봄 기억이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화사한 지난 2023년 3월 말, 언양에 간 날은 미세먼지도 없는 청명한 하늘이었다. 하늘이 너무 파래서 놀랄 정도였다. 장날이 아니라서 그런지 읍내가 한산했다. 점심때가 됐는데도 식당마다 주차장 빈 곳이 제법 눈에 띄었다. '코로나19' 이후 소비자 물가지수가 많이 높아졌다는 뉴스가 뭔지 몰랐는데 현장에서는 손님이 없는 모습으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먼저 언양 읍내를 승용차로 돌고 또 돌았다. 처음에는 문화의 길을 따라 돌다가, 읍성길이 나오면 또 그 길을 따라가봤다. 가다가 다방 간판이 나오면 염치없이 차를 세웠다. 무작정 차를 세우는 바람에 뒤따라오던 차량이 놀라서 "빵빵"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미안해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몇 바퀴를 돌았을까, 얼추 대여섯 바퀴를 돌고 나니 언양의 모습이 한 장의 지도에 담길 만큼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반나절을 보냈다. 

 헝클어진 생각이 정리됐을 때 구 언양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다방 찾기 탐방을 시작했다. 걸어서 다녀보니 언양은 수년 사이에 놀랄 만큼 환경이 정비되었다. 구 언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상북면 방향 중앙도로가 '문화의 길'로 단장됐다. 이 길은 옛 언양 중심도로다. 이 길을 따라 아직도 몇 개 다방이 문을 열고 있어서 반가웠다. 

 문화의 길에 감꽃처럼 핀 다방들이 보석처럼 빛난다. 구 언양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 건물 2층에 꽃다방이 있다. 10년 전 언양지역 다방을 찾아왔을 때도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때는 꽃다방 건너편 언양 알프스시장 안 골목길로 들어서서 경희한의원과 같은 계단을 사용하고 있는, 시장 안에 있는 여우다방만 보고 갔다. 

 그리고 상북 방향으로 가다 보니 울주새마을금고 맞은편에 해와 달다방이 있다. 여기서 상북 방향으로 150m 정도 될까, 언양기와집불고기 들머리 건물 2층에 천지다방이 있다. 

 또 언양 사람들의 추억 속에만 남아있는 초생다방이 언양초등학교 입구 사거리 상북 방향 코너에 있었다고 한다. 

 서진길 울산 예총 고문은 "이 다방이 언제 문을 열고 닫았는지는 모르겠다"라며 "언양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언양 다방 중에 이 다방이 가장 오래된 다방일 것"이라고 했다. 대략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추측하면 초생다방이 1980년대 중반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영업하고 있는 천지다방을 지나 작은 로터리를 돌아서 읍내 중심가로 다시 왔다. 오는 길에 읍성길 방향 코너에 임약국 간판이 보였다. 임약국 앞길을 따라 혹시 하는 생각에 읍성 남문2길을 따라갔다. 50m 정도를 걸었을까, 이 골목에서 다방 두 곳을 동시에 확인했다. 

울산 울주새마을금고 맞은편 건물 2층에 자리한 해와달 다방(2023년 3월). 정은영 제공

티켓다방이란 독특한 상술로 40곳까지 성업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읍성길 방향 경남은행 언양지점 가기 전에 태양다방이 있고 태양다방에서 도로 건너편에 행운다방이 있다. 태양다방 골목 안에 언양 사우나도 있다. 사우나에서 나온 사람들이나 읍성을 돌아본 사람들이 가끔 이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겼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번에 확인한 언양지역 다방 6곳 가운데 여우다방과 해와 달다방은 아쉽게도 수년 전 문을 닫았다. 초생다방은 이미 1980년대 사라져버렸으니 들먹일 이유도 없다. 

 발품을 판 덕에 먼지 수북한 문 닫은 다방의 간판이라도 찍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간판조차 없다면 과거 있었다는 설에 불과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 그 때문에 간판 사진을 찍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지금 문을 닫은 다방은 훗날 누군가 이 다방이 그리워서 찾아올 수 있을 텐데, 그때까지 다방 간판이라도 남아있었으면 했다.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다방간판 사진이라도 보고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1990년대 들면서 울산 도심 다방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 시점이 언양은 도리어 다방이 늘어난 시기였다. 울산시계탑 일대 도심에서는 대마초 파동 등으로 음악다방 유명 DJ들이 붙잡혀갔다. 그 틈에 월성 다방을 시작으로 한곳, 두 곳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때 언양 다방들은 티켓다방이라는 독특한 다방 상술로 다방 전성기를 누렸다.

울산 울주새마을금고 인근 천지다방(2023년3월). 정은영 제공

가족 책임지려 염치 불문 돈 벌었던 또순이들
티켓다방, 이 희한한 이름의 다방은 운영이 참 묘했다. 다방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레지가 쟁반에 커피를 담아서 들고 손님이 요구하는 곳으로 배달하는 형태다. 물론 일반 사무실에서 다방에 커피 배달을 시키는 기존 방식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배달 가는 곳이 숙박업소 등이었다. 레지들은 숙박업소나 비닐하우스 등으로 배달 가면서 다양한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당시 즉 티켓다방이 성업할 때, 언양 읍내는 건물 2층마다 다방이 있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다방 천국이었다. 소문에 40여 곳 다방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다방들이 남아있다면 언양읍 거리는 이색적인 볼거리 문화로 주목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승승장구를 누릴 것만 같았던 티켓다방들은 어느 날 모 방송사의 고발프로그램에 퇴폐업소라는 이름으로 철퇴를 맞으면서 하루아침에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당시 이야기인데, 지금은 문을 닫은 언양 시외버스 정류장 근방의 티켓다방에 가면 다방이라는 곳이 탁자가 한 개, 의자가 두 개 이런 식이었다. 말이 다방이지 사실은 일명 티켓을 끊는 영업을 했다. 전화가 오면 좀 음란한 차림으로 커피 쟁반을 들고 오토바이나 승용차를 타고 언양 일대 숙박업소 등으로 배달 가는 것이 다방 수입을 올리는 영업 수단이었다. 

 그 시절, 울산 도심에서 퇴출당한 다방 아가씨들이 모두 언양에 모였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언양은 울산 레지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레지들은 서로 길거리에서 만나면 끼리끼리 아는 체를 했다. 

 "너는 언제 왔노" "돈은 좀 벌리더나 ""내일 시골에 돈 좀 보내줘야 하는데 돈 있나, 오만 원만 빌리도" 신세타령이 길었다. 현실은 티켓을 뛰어야 하는,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레지들 가운데는 가족을 책임지는 또순이들이 많았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하루아침에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우리 옛 속담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라는 말이 있다. 이들의 삶이 그랬다. 티켓 영업방식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그러나 모든 염치를 전당포에 맡기고 오직 돈을 벌었던 또순이 누나들 덕분에 출세한 동생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레지 누나나 시내버스 안내양 누나가 보내준 돈으로 공부해서 성공한 사람이 많았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기에 하는 말이다. 그렇게 돈만 벌다 혼기를 놓쳐서 평생을 혼자 사는 누님들도 있다.  

 생각하니 봄날 아지랑이처럼 그 시절 다방 그림이 그려진다. 그때는 한낮에도 다방 오토바이가 요즘의 택배 오토바이처럼 읍내 도로를 씽씽 달렸다.     

 그 찬란했던 토종다방들이 거의 사라졌다. 강과 산, 토종 생태계가 파괴되듯 근대 대중문화 중심 역할을 했던 다방도 어느 날 멸종위기종이 돼버렸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