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느리고 여유로운 세상 단절된 그들만의 세계
[주말ON-감마르조바, 조지아] 11. 우쉬굴리와 바투미 유럽서 가장 높은 해발 2200m 우쉬굴리 중세 모습 그대로 간직한 듯 변화 없어 한국의 부산같은 흑해 연안도시 바투미 높은 빌딩 등 조지아서 가장 번화한 곳
우리의 펜션과 비슷한 호텔인 숙소 마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는다. 오랜만에 가져온 한국 라면은 잊었던 미각을 춤추게 한다. 평화롭고 느긋하다. 젖은 빨래를 마당 가 빨랫줄에 널었다. 바지랑대를 높이 받치자 바람에 금방 흔들린다. 뽀송한 햇살이 위무하는 한가로운 시간이다. 갑자기 돌아가고 싶다, 어린 날의 시간 속으로.
하얀 이불 홑청을 널어 말리던 마당에서 뛰어놀던 시절, 젖은 홑청 사이에 들어가 비누 냄새를 맡으며 무한한 상상으로 나아갔던 아이가 있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말라가던 하얀 이불의 너른 품이 내내 그리웠다. 내 모습이 이곳에 있다. 주인집 꼬마 아이들이 꼬챙이를 들고 뛰어놀고 있다. 나도 슬며시 함께 술래잡기한다. 보아도 못 본 척, 뛰어가도 못 붙잡는 척, 우린 금방 친구가 된다.
대게의 경우 메스디아에 오는 이유는 우쉬굴리(Ushguli) 마을로 가기 위해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해발 2,200미터에 있다. 정말이지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저들만의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곳에 가려면 이곳에서 약 46km를 더 가야 하며 몇 시간 이상 걸린다. 내일 떠나기 전에 이곳 광장으로 나갔다. 마침 축제의 현장이다. 이곳 사람들 다 나온 듯 왁자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별반 다르지 않다. 노래와 음악, 거리 자판대가 줄지어 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판매하는 곳에는 의례 코쉬키(Koshki) 모형이 있다. 마치 중세 시대로 훌쩍 건너온 듯 고개만 들면 코쉬키가 탑처럼 솟아 있다. 대게의 경우 집마다 하나씩 있다. 스반타워(svan tower)를 이곳 사람들이 부르는 코쉬키는 이곳 스반족의 주거 형태다. 우리네 첨성대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크기는 더 높다. 주로 9~12세기에 지어졌다. 보통 3~5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은 가축을 키우며 저장 창고가 있고, 위로 올라갈수록 방과 기도실로 사용한다. 망루 역할을 겸하며 적이 쳐들어오면 1층 문을 닫고 공격과 수비를 할 수 있는 설계로 되어 있다.
이른 아침 차를 몰아 드디어 우쉬굴리로 간다. 보이는 하늘과 산, 모든 것이 꿈만 같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드디어 도착한 우쉬굴리, 입속의 발음이 마치 동그란 알사탕을 하나 물고 말을 하는 듯 달콤하다. 몇 집을 두드렸으나 맘에 드는 방을 구하긴 쉽지 않다. 30년 전쯤을 거슬러 온 듯, 화장실도 전기도 상상 이상이다. 할 수 없이 목조주택의 문을 두드렸다. 1층은 식당, 2층을 개조하여 게스트하우스로 사용하고 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 더는 지체할 수 없다. 여장을 푼다. 발을 뗄 때마다 삐그덕삐그덕 무너질까 조마조마하다. 나 하나 누우면 그만인 작은 나무 침대다. 창을 연다. 빗물이 꽃처럼 처마에 매달려 하나씩 똑똑 떨어지는 게 무척이나 아름답다. 코펠에 물을 데우고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신다. 지도를 펴고 이곳을 손가락으로 짚어본다. 한국은 어디쯤일까. 나는 또 어디쯤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빗물처럼 지붕을 타고 흐른다.
이른 아침 눈을 떴다. 어제처럼 먼저 창을 열었다. 좁은 골목에 사람들이 모였다. 물건을 싣고 온 작은 트럭에 생필품이 가득하다. 양배추, 과일 등이 실린 듯하다. 어제 비 탓에 길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온갖 동물들의 배설물과 진흙이 섞여 걷기조차 쉽지 않다. 마을을 산책한다. 그 옛날 어떻게 이곳까지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살게 되었는지 그저 신기할 뿐이다. 10시쯤 되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푸르디푸른 지중해 빛깔이다. 저 멀리 만년설 쉬카라(5,193m) 산봉우리가 우람하게 솟아 있다. 저 산에서 녹은 빙하가 끝도 없이 강줄기를 이루며 흐른다. 이곳은 약 70여 가구에 25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1996년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마을이다. 세상은 하루하루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모든 게 느리고 여유 있다.
조금 걸어 언덕에 다다랐다. 성당이다. 하얀 수염이 긴 성직자의 눈이 나를 응시한다.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감마르조바" 인사를 건네니 낡은 나무 의자에 앉은 채 고개만 끄덕인다. 성당 안의 기도처는 돌을 쌓아 우리네 석굴암보다 더 조그마하게 지어졌다. 작은 창 사이로 한 줄기 빛이 마치 칼날처럼 번쩍이며 들어온다.
다시 언덕에 올랐다. 낯익은 언어가 반갑다. 서울에서 온 관광객이다. 마치 친구처럼 반갑고 즐겁다. 마음껏 우리 말을 나눌 수 있다는 이유가 갑자기 청정한 공기보다 더 시원하고 상쾌하다. 마침 스페인에서 온 로버트는 혼자 점프 사진을 찍으며 라이브 방송을 하고 있다. 내가 다가가 같이 '나르샤'를 하자고 하니 흔쾌히 “땡큐"라고 한다. 우린 마치 오랜 친구처럼 쉬카라 산을 배경으로 힘차게 뛰어올랐다. 이렇게, 저렇게 숨을 헐떡이며 수없이 뛰었다. 한 장의 사진,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지금도 우린 페이스북 친구가 되어 서로 안부를 나누니 여행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나 보다.
어떤 이는 차로, 어떤 이는 말을 타고 산으로 들어간다. 가는 길은 그야말로 야생화의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가도 가도 당도 못 할 산정인가. 돌아서야 했다. 꽃은 나를 반기며 저리 해맑게 향기로 유혹하건만,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여행자의 신분을 잊을 수는 없다. 백마를 타고 노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저 꽃밭을 달리는 공주의 유혹이 있다 해도 어쩌랴! 시간이 멈춰주지 않는 한, 나는 돌아가야 한다. 최대한 속마음을 숨긴 채 웃으며 발걸음을 떼야 한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온 길을 돌아 바투미(Batumi)로 간다. 그곳엔 잊지 못할 또 한 사람의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바투미는 조지아의 흑해 연안 도시다. 우리나라의 부산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바투미는 유럽 문명이 몰려와 조지아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빌딩이 그야말로 우쉬굴리와는 100년은 족히 차이 날 만큼 화려하고 번잡하다.
작년에 우연히 만난 '고차'(Gocha)는 젊은 신혼의 친구다. 부부는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며 최선을 다해 섬겨 주었다. 알콩달콩 깨소금 나는 신혼에 어린 아기가 있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 들어간 집이라 내 기억이 희미하다. 바투미에 도착한 후 다음 날 바로 그 집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다. 분명히 강을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돌아 골목을 몇 번 굽이지면 막다른 길 끝에 동화 속 뾰족지붕처럼 나를 맞이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이웃 집에 들러 '고차'를 아느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사진을 보여주어도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섰다. 흑해 바다를 걷다가 백야로 인해 늦은 시간, 일몰 앞에 선다. 소멸보다 더 슬픈 게 무엇일까 싶다. 뜨겁게, 황홀하게 살다가는 태양은 후회가 없다는 듯 찬란하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라는 어느 작가의 제목처럼 흐르는 것은 어쩌면 마음속에 정해진 관념이 아닐까 싶다. 간절함, 애틋함 그리고 아득한 절멸의 시공간을 초월한 삶의 지향점은 어디서 찾으랴. '알리와 니노 Ali & Nino' 조각상이 있는 미라클 공원에 간다. 아제르바이잔의 무슬림 소년과 조지아의 기독교 소녀는 신분과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그러다 알리는 전쟁에 나가 그만 사망했다는 줄거리의 소설이 있다. 이 모티브를 가지고 8m의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었으며, 10분 정도마다 회전하면서 한 번 만나고 헤어지기를 무한 반복한다. 만남과 헤어짐이 우리 삶의 바탕이지만 영원한 이별은 두렵다.
알리와 니노가 되기 싫다며 혼자 웃으며 다음 날 다시 기억을 더듬어 친구를 찾아 나섰다. 산모퉁이의 언덕에 연초록 지붕을 한 그의 집이 눈에 선하지만, 쉽사리 나타나지 않는다. 골목을 돌고 돌아 흙길을 얼마나 돌았을까. 잘못 들어선 길에서 차를 돌리려다 내렸다. 앗! 그의 아내가 먼저 놀라 소리를 지른다. 아니 이럴 수가! 숨이 멎은 듯 걸음을 떼지 못한다. 그는 남편을 부르며 달려온다. 와락, 오누이처럼 손을 잡는다. 고차와 뜨거운 포옹을 한다. 생각지도 못한 내 방문에 눈물을 훔친다. 내가 엉뚱한 곳에서 계속 길을 헤맸던가 보다. 어떻게 다시 왔느냐며 질문이 끝이 없다. 작년에 찍은 사진을 주며 늘 잊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아내가 손뜨개질로 만든 컵 받침대를 선물로 내어준다. 우린 뜨거운 조지아씩 커피를 마시며 형제처럼 짧은 만남을 해후했다. 마침 잠에서 깬 아기가 아장아장 걸어온다. 축복의 시간이 흑해의 일몰처럼 아름답고, 희열이 내 마음의 여백에 더 짙게 덧칠을 해준다. 여행은 만남이지만 또 이별이기에 요동치는 이 이율배반적인 미세한 파동이 늘 설레게 하는 걸 어쩌겠나. 이서원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