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역 학성동 시절 사람들 미어터지던 번화가
[주말ON-정은영의 新 다방열전] 40. 함월다방, 그리고 학산로 다방들(1)
시작하면서
며칠 전 입동이 지났다. 절기로는 겨울이지만 아직도 가을은 끝나지 않았다. 지난 주말 밀양 얼음골 일대는 2024년 주춤주춤하는 끝물 단풍을 즐기려는 사람들로 도로가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역시 풍경이 좋은 카페는 빈자리가 없었다.
얼음골 사과밭 주인들도 옛날에는 불룩한 돈 망태를 쥐고 남명리 단골 다방에서 커피 한 잔에 피로를 풀었다. 그 다방들은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한꺼번에 사라지듯 했을까. 최소한 남명리 일대에 씨를 할 다방 하나는 남겨뒀어야 한다. 그 다방을 찾아오는 낭만 가객들에게 그리움의 단풍 엽서를 선물할 수도 있을텐데…. 아쉬움이 절절한 가을이 낙엽 따라 저물고 있다.
단풍잎 같은 추억 하나
근 40년 전의 이야기다. 열차가 대표 교통수단이던 시절, 구 학성동 울산역 앞 학산로는 공업탑만큼 중요한 울산 관문이었다.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과 내린 사람들이 뒤엉켜서 울산역 대합실은 수시로 난장판이었다. 역 앞 학산로 역시 울산역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미어터지지는 마찬가지였다.
이를 틈 탄 소매치기, 일명 쓰리꾼들이 설치면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역에 갈 때는 지갑이 든 주머니를 손으로 쥐고 다녔다. 할머니들은 몸 빼 속옷에 핀을 꽂아 주머니를 달고 다녔다. 그래도 쓰리꾼들이 돈 냄새를 귀신처럼 맡고 따라다녔다.
이런 날은 역전파출소 경찰들도 열차가 오고 가는 시간에는 파출소 옥상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역 광장을 유심히 살폈다. 사람들과 짐이 밀려들던 그 시절이 울산역이 있던 학성동 전성기였다.
울산역이 학성동에 있을 때 학산로는 잘 나가는 골목이었다. 어느 날 울산역이 남구 삼산으로 옮겨가고 나자 이튿날 아침부터 학산로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했다. 다방과 술집들은 점심때가 지나도록 마수걸이조차 못 하기 시작했고 한집, 두 집 문을 닫았다. 경주 팔우정 로터리에서 울산역까지 운행하던 일명 총알택시도 가뭄에 도랑물 줄 듯이 한 대, 두 대 줄더니 결국 어느 날부터는 오지 않았다.
학성동 울산역 전성시대
울산역의 학성동 시절, 동으로는 기장과 남창, 북으로는 경주, 입실, 안강 등지의 농산물이 울산역을 통해 들어왔다. 울산역 근방에 여러 재래시장이 문을 열었다. 번개시장으로 불렸던 학성 새벽시장과 구 역전시장, 중앙시장이다. 새벽시장은 어느 날 도매시장으로 탈바꿈했고 나머지 시장들은 비가 새기도 하는 허름한 가 건물 아래서 지금도 옛 추억을 팔고 있다.
농산물이 울산역을 통해 유입되던 시절은 울산역에 지게꾼들이 많았다. 그 시절은 역 광장 맞은편에 지게와 손수레를 줄줄이 대기시켜놓고 짐을 챙기던 지게꾼들의 모습이 흔했다. 지게꾼들의 수송을 통해 짐들이 인근 여러 시장으로 배달됐다.
당시는 역전 지게꾼 하면 끗발도 있었다. 그들끼리 단합을 하므로 예사로 건드리다가는 혼쭐이 났다. '역전 지게꾼은 아무나 하나'라고 할 만큼, 이 시절 지게꾼의 세력이 만만찮았다. 지게꾼들이 휴식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무질서한 것처럼 해도 나름 질서정연했다. 짐이 별로 없을 때는 받는 순서도 정해져 있었다. 아무나 지게 졌다고 짐을 나르려고 할 수 없는 그들만의 규칙이 있었다. 지게 지는 것도 권리금을 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권리금을 내도 울산역에서 지게꾼을 해도 일가족이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는 말이다. 역전 동편 학성공원 쪽에 터를 잡은 지게꾼들은 일이 없을 때는 지게에 반쯤 다리를 걸치고 누워있거나 끼리끼리 장기판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열차가 도착하는 시간부터는 민첩하게 움직였다. 짐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였다. 순서대로 짐을 받아도 재수가 좋으면 다른 짐꾼보다 비싸게 받는 짐을 지고 갈 수 있었다.
가물가물한 시절 이야기를 들추자 가을 햇볕에 빛바랜 수채화처럼 못내 아쉽고 그리운 풍경들이 쏟아진다.
학산로 다방과 방석집들
1992년 초까지만 해도 역 앞 학산로 거리는 울산 번화가였다. 이 거리에 점포 한 개 있으면 등 따시고 배부른 시절이었다. 점포 한 개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던 시절, 학산로 역 앞 거리는 하꼬방 1층 점포에 방석집이라 불리는 술집들이 줄줄이 있었고 슬라브 2층에는 다방들이 있었다.
역전사거리 역전다방(지금의 세민다방)을 시작으로 학산로에는 현대다방, 함월다방이 있었다. 그리고 학산로 함월다방에서 역전시장 방향으로 명성다방이, 학성공원 방향으로 동경다방과 도심다방, 육교다방이 있었다. 그중 육교다방은 자리를 옮겨서 학성공원 앞 골목길에 새로 둥지를 틀고 영업하고 있다.
그 시절, 울산역 풍경으로 해거름 때가 지나면서부터 역 주변 방석집 아가씨들이 소매를 붙들었다. 통행 금지가 있을 때도 이 술집들은 불빛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담요로 문을 가려놓고 밤샘 영업을 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들기도 했다.
어떤 청춘은 일부러 역을 나서면 걸음을 느릿느릿하게 걸었다. 이들의 수작에 대꾸하면서 은근히 즐기기도 했다. 청춘들이 눈을 두리번거리면 알아챈 아가씨 한 명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귀에다 대고 "이쁜 아가씨 있어예, 좀 놀다 갈랍니꺼"했다.
방석집 아가씨들이 화장기 진한 얼굴로 속삭이는 그 한마디에 청춘들은 순간 뼈가 흐물흐물해졌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아가씨들이 붙잡으면 소매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이들의 호객행위 때문에 역전파출소 경찰들도 골치가 아팠다. 방석집 아가씨들은 호객행위로 역전파출소에 붙들려와서는 밤을 꼬박 새우고 이튿날 새벽 북정동 울산경찰서 앞마당에 모여서 닭장차로 불리는 경찰버스를 타고 부산 부전역 앞 즉결 재판소에까지 가서 벌금을 물고 간신히 풀려났다. 방석집들은 역 앞 학산로 거리를 자기들 세상처럼 했다. 역 앞과 학성공원, 지금의 중앙동사무소 앞에 아직도 방석집들이 일부 남아있다. 당시는 당연히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었다.
1990년대 필자가 경찰서 출입 기자 시절만 해도 어느 방석집이든 이런 일들로 매일이다시피 아가씨들이 붙들려왔다. 너무 흔한 일이다 보니 술집 아가씨 붙잡혀오는 것은 기자들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최소한 다방 아가씨들이 문 닫고 영업하다 붙들려오면 가십거리라도 한 꼭지 만들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시절에는 가끔 다방도 심야에는 문을 닫고 도라지 위스키 즉 티라는 술을 팔았다.
역 문 닫자 하루아침에 발길 뚝
사실 방석집에 비하면 다방 아가씨들은 점잖은 편에 속했다. 최소한 노골적인 표현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인지라 돈 욕심에 가끔 문 닫고 영업하다 이웃집에서 신고하는 바람에 들켜서 마담까지 울산경찰서에 붙들려오기도 했다. 다방 주인들이 울산경찰서 앞 수경다방에서 사태수습을 위한 방안을 찾기에 골몰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수경다방은 커피를 파는 다방이라기보다 사건 해결을 위한 장소였다. 실내가 좀 어두컴컴했고 칸막이가 있었다. 그때가 1990년대 초반이었다. 역 앞 학산로를 중심으로 함월초등학교까지 그 많던 다방들과 술집들은 학성동 울산역 시대가 끝나면서 문을 닫기 시작했다. 눈치 없는 주인들은 역이 문을 닫았는데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영업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왕창 손해를 보고 문을 닫았다.
학성동 울산역은 1992년 8월 20일을 끝으로 업무를 마감했다. 역 마지막 날 기록으로 남아있는 서진길 울산예총 고문의 기록사진집(사진으로 본 울산 100년)에 내일 역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만큼 엄청난 인파가 열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향해 몰려나오고 있다. 내일 아침 열차는 분명 오지 않을 것인데 사람들은 실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튿날인 8월 21일 첫 열차부터 남구 삼산 지금의 태화강역으로 들어왔다. 울산역이 문을 닫자 학산로 일대는 하루아침에 사람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어제가 마지막 열차라고 해도 오늘 아침이 이렇게 황망할 줄 몰랐다. 역전파출소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쓰리꾼들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지금 학산로는
울산역 이전과 함께 약 40년 동안 침체기에 있었던 학산로에 아직도 다방이 남아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옛날 울산역 자리에는 주상복합건물이 들어섰다. 그러나 거리는 그러나 찾는 다방들은 안타깝게도 다방은 거의 문을 닫았다. 2~3년 전까지만 해도 함월다방, 현대다방을 비롯해 대 여섯 곳이 있었는데…. 겨우 구, 역 앞 사거리 세민다방이 영업하고 있고 함월다방, 현대다방은 간판만 남아있다. 머지않아 간판마저 사라질 것이다. 도심다방과 동경다방, 명성다방들은 오래전에 문을 닫으면서 간판까지 흔적이 없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