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허락한 자만 갈수 있는 대평원

[주말ON-감마르조바, 조지아] 12. 오말로에 도대체 무엇이 있어?

2024-11-28     이서원
오말로 가는 아바노패스. 이서원 제공

 

22년 봄, 처음 조지아에 갔을 때는 아무런 정보나 사전 지식이 없었다. 무작정 걷고 모든 것을 눈에 담아오려는 욕심만이 가득했다. 그때 시내를 거닐다 작은 상점에서 몇 장의 기념품 엽서 앞에서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거기엔 정말 아름다운 자연 속에 집 몇 채가 동그마니 있는 천하절경이었다. 여기가 어딜까? 며칠 후면 이곳을 떠나야하는 일정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주인에게 "사드 바르?"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곧이어 "투세티, 오말로"(Tusheti Omalo)란다.

 근처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야겠다고 바닥에 앉아 검색을 했다. 앗, '신이 허락한 자만 갈 수 있는 곳'이란다. 그래, 내가 안가면 누가 간단 말인가. 오만한 자의 이 착각이라니! 상점 주인은 지금은 그 누구도 이곳을 들어갈 수 없는 금지기간이란다. 조지아에서 가장 오지이면서 아직 눈이 녹지 않아 보통 일반인에게는 7월에서 9월까지만 오픈된다고 한다. 엽서 한 장 품에 안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지만, 내 꼭 여기는 다녀오고 말리라는 혼자만의 약속을 했다. 

우연히 발견한 기념품 엽서 속 천하절경

그로부터 2년 후, 오늘 조지아 3차 여행의 백미 오말로를 드디어 간다. TV 세계테마기행에서도 여러 번 소개된 이곳은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가야할 만큼 험준하기로 유명하다. 이곳을 가면 마치 오래전 친구가 있어 나를 반겨줄 것처럼 오묘한 매력과 신비로운 자연의 충만한 기운이 있을 것 같다. 

 조지아 친구인 짜카리아에게 같이 오늘 오말로를 가자고 했더니 그는 절대로 가진 않을 거란다. 3년 동안을 가끔 통화하면서 "나는 꼭 갈 것이다"라고 하면 그는 한번도 "그래"라고 한 적 이 없었다. 변함없이 "가지마라. 가면 죽는다. 사고 난다. 위험하다" 등이었다. 그만큼 현지인에게도 악명 높은 지역이라는 뜻이고 날 위한 충고였음을 안다. 그렇더라도 내가 안 갈 수 없지. 수도인 트빌리시에서 바로 가는 차는 없다. 보통 알바니(Alvani)에 가서 거기서 다시 전문 4륜 델리카 차량을 탑승하고 간다. 할 수 없이 친구에게 중간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는 흔쾌히 델리카 차량 기사까지 통화를 해서 알바니에 무사히 내렸다.

 조그마한 소도시인 알바니에 도착하니 전문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쪽다리가 조금 절고 있었지만 매우 친절하고 우직하다. 이름은 '마무까'였다. 서로 악수와 인사를 나눈다. 차에는 기름과 타이어, 연장통 등이 구비되어 있다. 아마도 가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손수 정비도 하고, 중간에 연료가 부족하면 또 채워야 하니 준비가 철저하다. 오랜 경험에서 나오는 준비성이리라. 

오말로 마을 전경. 이서원 제공

 

목숨 걸고 가야하는 험준한 오지

오후 1시, 드디어 오말로를 간다. 3년을 기다린 내 마음은 그야말로 저 높은 산봉우리보다 더 고도를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전 유럽을 통틀어 가장 높은 죽음의 도로 아바노 패스 (Abano pass) 2,850m를 오른다. 수없는 고갯길, 오프로드의 차량이 뽀얀 먼지를 민들레홀씨처럼 날리며 산모롱이를 돌아가고 있다. 마무까는 핸들을 꼭 잡은 채 앞만 응시한다. 십여 년 째 이 길을 달리며 운전을 해도 안심할 수 없다는 듯 철저한 자세가 믿음직스럽다. 말을 시켜도 단답형일 뿐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급커브 길은 몇 번의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야만 겨우 차가 오를 수 있다. 

 가다가 보면 군데군데 영정 사진이 있다. 이곳에서 차량 사고로 죽은 이들이란다. 섬뜩하고 무섭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돌아설 수는 더욱 없다. 이 도로는 1978년 러시아와 이어지는 군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나, 도로라고 하기엔 너무 열악한 환경이다. 우리나라의 높은 산 소방도로보다 못하다. 

 8월 한여름인데도 응달엔 눈이 가득하다. 4시간 이상 70km를 달렸을까. 마무까가 드디어 긴장을 풀고 환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저 앞을 가리킨다. 무사히 다 왔다는 안도의 환희다. 이 높은 곳에 대평원이 펼쳐진다. 꽃들이 춤을 춘다. 구름이 닿을 듯 손에 잡힌다. 뾰족 탑, 뾰족 통나무집이 엽서 속 사진과 같다. 

 2층 통나무집 '아루다'(ALUDA) 게스트하우스에 여정을 풀었다. 작은 방으로 안내 받았다. 전망이 일품이다. 거실에 앉으면 저 높은 산정이 눈앞에 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삐걱삐걱 침대는 불편하지만, 이곳의 환경을 생각하면 감사할 뿐이다. 사방이 캄캄하다, 전기도 함부로 쓸 수 없다. 마당을 나오니 맙소사! 밤하늘에 별이 그냥 한 광주리 쏟아지는 참깨 같다. 형언할 수 없는 저 은하수의 별을 어찌 표현 할 수 있겠나. 나는 벌렁 바닥에 누웠다. 이만한 별, 쏟아지는 유성우가 그저 신기하고 놀라운 따름이다.    

오랜 친구처럼 정겨웠던 오말로 숙소 주인 리아(왼쪽)와 친구들. 이서원 제공

 

7~9월만 개방 현지인들 나머지 시간은 도시생활

이튿날 일찍 눈을 떴다. 해가 4,800m 산정을 힘겹게 넘어오는 듯 초원에 쌓인 어둠이 시푸르다. 이곳은 아랫마을 오말로, 저쪽은 윗마을 오말로다. 천천히 윗마을로 걷는다. 부지런한 말과 소들은 벌써 초원에서 풀을 뜯는다. 

 이 오지를 어떻게 알고 사람이 들어와 살았을까. 지금 이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시적으로 개방된 여름철에만 여기 들어와 관광객을 받는다. 주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으며, 차량 운전과 목축을 겸하고 있다. 50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가을이 오면 서둘러 도시의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숙소 주인 리아(Lia)를 만났다. 간이 상점에서 둘이 나란히 앉았다. 이야기를 나누니 오랜 친구 같은 정겨운 마음이다. 나이를 물으니 나와 같다. 너무나 좋아하며 얼굴이 더 방긋해진다.  

 정갈하게 차려준 아침을 먹고 리아가 불러준 운전기사를 통해 더 깊숙이 오지로 탐방을 나간다. 1시간 이상을 달렸을까. 그곳에도 몇 몇 가구가 살고 있다. 달트로(Dartlo) 마을이다. 산정에 있는 요새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너무나 아름답다. 저기까지 오르기로 한다. 1시간 남짓 올랐다. 쏟아지는 땀으로 몸이 축축하지만 싫지 않다. 돌탑, 돌집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지만, 그 정교한 돌을 쌓아올린 장인의 솜씨는 일품이다. 하산하여 다시 기레비(Girevi) 마을까지 간다. 많은 트레킹을 와서 걷고  또 걷는다. 드디어 닿은 기레비 마을, 저 높은 산 너머가 바로 체첸공화국이다.

 지금은 러시에 연방에 속해있지만 한 때는 독립을 위해 1차(1994~1996), 2차(1999) 체첸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독립의 기세가 꺾여 친러 정책의 기조로 가고 있는 듯하다. 이들의 독립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이유는 체첸 지역이 유전이 풍부하며, 카스피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유전을 공급하는 송유관이 이 땅으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이들을 독립시켜주면 다른 소수민족들의 연쇄 독립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산 아래 서서 저 너머 체첸의 나라를 보며 물결처럼 요동치는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정치는 자국의 안녕만을 바랄 뿐, 어떤 인정과 관용도 없음이 슬슬할 따름이다. 

달트로 요새. 이서원 제공

 

동생보다 젓가락 사용을 잘하던 리아

저녁에 리아와 다시 마주 앉았다. 감자, 양파, 고추 등을 넣어서 전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고소한 냄새가 오말로 마을을 흔든다. 리아는 자꾸 "포크, 포크"라는 말을 되풀이한다. 나는 가져간 젓가락을 내밀었다. 한국식으로 젓가락 잡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데도 다시 또 "포크, 포크" 라고 한다. 소통이 어렵다. 알고 보니 이 부침개에 포크(pork) 즉, 돼지고기가 들어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곳 투세티 지역에 들어오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종교적이거나 전통적인 관습이 있는 듯했다. 나는 전혀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니 그제야 젓가락을 들고 전을 엉거주춤 들어 올린다. 

 처음 접한 젓가락이 신기해서 연신 웃음이 달덩이처럼 환하다. 동생 리노도 흔쾌히 같이 마주 앉아 아름다운 저녁을 보낸다. 리노는 영 젓가락질이 서툴다. 하는 수 없이 손으로 전을 집어 먹는다. 자기네 입맛과는 다른지 부엌에서 소금을 갖고 와 엄청 뿌린다. 난 너무 짜서 토할 것 같다고 했더니 리아는 이제 입에 맞는지 연방 엄지 척을 하면서 밤이 깊어간다.

이서원 시조시인

 

 내가 갖고 간 시집 한 권을 건네주었다. 그는 너무나 고마워하면서 꼭 잘 보관하겠단다. 읽은 수 없는 우리글이지만 그는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오늘의 시간을 잊지 말라며 아끼던 와인을 갖고 와 서로 건배를 한다. 

 그러면서 리아는 동생보다 자기가 더 젓가락 사용을 잘한다고 꼭 적어달란다. 우리는 웃으면서 서로의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4일간 정말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혼자 걷다, 초원에 누웠다, 풀꽃을 귀에 걸며 혼자 노니는 즐거움이 화양연화였음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감마르조바, 오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