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혈인이지만 첫사랑 죽자 함께 묻어달라며 통곡했던 사나이
[감마르조바, 조지아] 14.고리에서 만난 스탈린의 두 얼굴
내 주위 사람 대부분은 조지아 나라를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가끔 어떤 친구는 자신 있게 안다며 큰소리치지만, 그마저도 커피와 미국의 조지아주(州)를 이야기한다. 그만큼 조지아는 우리에게 낯설고 생소한 나라다. 그러다가 소련의 독재자였던 스탈린을 이야기하면 모르는 이가 없다. 조지아보다 더 유명한 스탈린, 그가 태어난 나라라고 하면 화들짝 놀란다. 오늘은 그의 고향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독재자 스탈린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수도 트빌리시의 아침은 가랑비가 내렸다. 우산도 없이 얇은 우의를 걸치고 배낭을 둘러멨다. 작은 돌이 오밀조밀 박힌 구도심을 걷는다. 개들의 천국, 덩치가 산만 한 개부터 시작해서 작은 푸들까지 졸졸 따라온다. 먹을 것을 줄 게 없는데 아침부터 괜히 미안하게 만든다. 손을 휘저으며 “저리 가!"라고 외치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저 개들이 내 말을 알아듣겠나 싶었다. 이 나라는 개를 묶어놓는 법이 없다. 자유로운 활보다. 크게 위험하지도 않다. 순한 양처럼 그저 묵묵히 따라오다가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 돌아서 간다. 못 본 척 나도 쿠라강 다리를 건넜다. 사람들 대부분은 우산을 쓰지 않는다. 이 정도 비쯤은 거뜬히 맞아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출근길을 바삐 가고 있다.
우리네 시골과 다르지 않았던 스탈린의 나라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은 우리네 시골과 다르지 않다. 고속도로를 달려도 이곳에선 통행료가 없다. 아마 사회주의 시절부터 있었던 터라 징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갈수록 빗줄기가 굵어졌다. 저 멀리 신작로로 펼쳐진 긴 비포장 길이 사뭇 목가적이었다. 곧게 뻗은 황톳길 옆으로 키 큰 미루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었다. 무작정 저 길을 끝없이 걷고 싶었다.
버스를 놓치고 읍내에서 집까지 혼자 십 리를 걸었다. 간혹 지나가는 용달차는 뽀얀 먼지를 휘날리며 앞을 지나갔다. 손을 들 용기도 없었던 어린 시절, 그저 타박타박 걸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봄이라 들판에는 푸른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고 나무에도 물이 올라 바람이 따뜻했다. 저만큼 동네가 보여도 좀처럼 좁혀지지 않던 거리, 멀리서 자전거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반쯤 엉덩이를 들고 페달을 힘차게 밟아 삐거덕삐거덕 소리를 내며 조금씩 나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로 형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은 동생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자전거 뒤에 앉아 허리를 꼭 껴안은 채 등에 기대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서러웠던 것일까. 그저 고마웠던 것일까.
이런 신작로를 보면 아직도 그냥 한없이 걷는 꿈을 꾸곤 한다. 수만 리 먼 타국에서 불현듯 마음 한 자락이 젖었다.
약 90km 거리를 1시간 30분 정도 달렸다. 저 멀리 도시가 보였다. 바로 고리(Gorl)다. 왠지 도시의 풍경마저 어둑하고 음침하다. 이게 바로 선입견일까. 스탈린에 대한 나의 인식이 이토록 무섭다. 새롭게 바라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이 학습된 관(觀)을 버리기란 쉽지 않다. 도시는 소박하고 길거리는 깨끗했다. 저 멀리 언덕에 보이는 대형 조지아 국기가 비에 젖은 채 축 늘어져 있다. 펄럭이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소련에 지배당하며 자유를 몰락당했던 이들의 모습이 저랬을까 싶다.
조국 배신하고 고향마저 통치수단 삼은 독재자에 측은지심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 그는 이 나라의 국민을 어떻게 지배했을까? 조국을 배신하고 오로지 집권 야욕에만 몰두해 고향마저 통치의 수단으로 삼았을까?
박물관은 숲으로 이루어진 넓은 공원에 있었다. 입구에 서 있는 동상은 콧수염이 양 갈래로 길러진 채 군복을 입고, 한 손은 주머니에 넣었으며 시선을 저 멀리 두었다. 이 사람이 그토록 잔인한 인성의 소유자였던가. 눅눅하고 음침한 기분은 뭘까? 붉은 양탄자가 깔린 계단을 오르면서도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 사라진 스탈린이지만 이곳으로 자랑스럽게 불러온 이유는 분명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독재자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전시실에는 아무도 없이 혼자다. 내 발자국에서 나는 작은 소리조차 무섭다. 집무실을 재현해 놓은 책상 위에는 생전에 그가 사용한 담배 파이프와 시가가 놓여있다. 갑자기 측은지심이 일었다. 삶과 죽음이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학살했을까. 그냥 저 차가운 동상 주머니에 깊이 찔러 넣은 손을 꺼내 잡고 살며시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아무리 권위적이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냉혈인이지만 마음 한쪽에 그의 번민과 고뇌가 어찌 없었겠나 싶다. 이 마음이 고리 사람들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여기 와서 불현듯 되뇌어지는 건 뭔가.
첫 아내 예카테사나, 결혼 후 16개월만에 첫 아들 낳고 병사
스탈린은 1878년 12월 이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학비조차 낼 수 없어 학교를 퇴학당했을 만큼 가난했으며, 키도 작아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런 그가 시를 쓰며 문학에 심취했고 신학자가 되고자 했다는 건 또 다른 배경이다. 개혁보다 혁명이 더 쉬웠던 선택이었을까. 청년 시절 그는 전제주의와 봉건제도가 팽배한 소련의 변화를 꿈꾸었다. 후진 농업국을 중공업 국가로 탈바꿈시키며 그는 일약 지도자 반열에 올라섰다. 세계 2차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면서 강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견제와 숙청을 통해 독재의 길로 들어섰다. 소수민족의 강제 이주(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한 우리나라 한인도 포함), 반혁명 분자 색출, 수백만 명의 대학살, 수십만 명의 총살 등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정책은 잔인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바로 예카테리나였다. 그를 만나 한 달 만에 비밀 결혼식을 올렸지만, 행복한 결혼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약 16개월 만에 첫아들을 낳고 병에 걸려 그만 죽고 말았다. 한 여자의 남자로 사랑하며 오래 살고 싶었던 바람이 사라지자 울부짖었다. 장례식에서 그와 함께 묻어달라고 통곡하며 기절한 스탈린, 그의 인간적인 면에 연민이 나도 모르게 일었던 걸까. 어쩌면 여기 고향 사람들도 이런 면에서 박물관을 짓고 그의 생전 유품을 보관하며 기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술 취하면 못 잊어 살리지 못함을 자책하기도
비는 거칠 줄 모르고 더 세차게 내렸다. 석조기둥을 비켜 박물관 뜰을 빠져나왔다. 키 큰 플라타너스가 아름다운 보도를 걷다 정류장 옆 작은 상점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이곳에도 스탈린의 흉상, 파이프 등 그의 모습을 만든 관광 상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스탈린 사후에도 그를 소환하여 먹고 사는 듯했다. 주인은 덩치가 크고 인상이 좋았다. 이것저것 고르려고 기웃거리자 역시 스탈린의 흉상 상품을 내밀며 권했다.
술에 취하면 스탈린은 첫 여인을 못 잊어 생명을 살리지 못함을 자책했다고 한다. 가장 인간적인 면에서 그동안 알고 있었던 독재자의 이미지가 조금씩 내 의식에서도 빗물에 씻겨져 가는 이 기분은 뭘까. “내 전부인 아내, 그가 죽었을 때 나도 같이 죽었소"라며 울부짖던 사나이, 그가 길게 피워 올린 파이프의 하얀 담배 연기가 지금도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청년 시절부터 바랐던 문학·신학도의 길 걸었다면 어땠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청년 시절부터 바랐던 시를 쓰며 문학도로 걸었더라면, 아니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독재자, 살인자라는 오명으로 얼룩진 그의 삶은 정반대로 인도되지 않았을까. 아름다운 길에서 그가 꿈꾸었을 새로운 세상은 분명 모든 이가 바라는 최고의 나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럼 지금의 러시아, 조지아는 세계인이 부러워하는 중심지가 되었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하고 작은 카페에 앉아 창밖을 오래 응시했다. 여전히 비는 거칠 줄 모른 채 쏟아지고 있었다. 이서원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