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사랑했던 103세 할아버지
이상원의 이야기를 담은 풍경 (33)
바둑 애호가 할아버지 산소에 느티나무 바둑판 헌정
직장에서 은퇴한 후 고향에 와서 표고버섯 농사를 짓기 위해 할아버지가 남긴 산에 20평의 건물을 지었다. 취미로 목공예를 시작하면서 지금은 창고 겸 목공방, 쉼터로 사용하고 있다. 목공예에 가장 적합한 느티나무를 구하려고 애쓰던 중, 후배의 밭에 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 두 그루를 얻을 수 있었다.
포클레인을 동원해서 엔진톱으로 베어 옮긴 후 산속 그늘에서 2년간 자연 건조했다. 이후 제재소에서 켜서 판재로 만들었는데, 그중 직경 70cm가 넘는 판재 하나로는 바둑판을 만들고 싶었다. 직접 제작하기보다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해 인터넷에서 알아본 뒤 경북 경산에 있는 경북바둑상사를 찾아갔다. 배성관 대표는 45년 간 바둑판을 제작해온 장인이었다.
그는 요즘 바둑을 두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두꺼운 바둑판보다 가벼운 소품 위주의 제작이 많아졌는데, 오랜만에 기목(느티나무의 다른 이름)으로 명품 바둑판을 만들게 되어 반갑다고 했다. 완성된 바둑판을 찾아 오는 길에 마음이 참 뿌듯했다. 바둑판의 크기는 정규 규격보다 약간 큰 가로 43.5cm, 세로 45.5cm였고, 두께는 10cm, 워낙 단단한 재질이라 무게는 16kg에 달했다.
유난히 바둑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완성된 바둑판을 할아버지 산소 앞에 놓고 혼자만의 헌정식을 가졌다. 마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시는 듯 했고, 자연스럽게 할아버지와의 바둑에 얽힌 추억들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바둑을 늦게 배워 바둑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바둑에 대한 애정만은 누구보다 깊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사랑채에는 바둑을 두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나 역시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곁에서 바둑 두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바둑을 배웠다. 처음 할아버지와 바둑을 둘 때는 당연히 내가 바둑판 위에 미리 검은 돌을 잔뜩 놓고 시작했다. 하지만 점차 치수가 계속 조정되어 어느새 할아버지와 대등한 수준이 되었고, 시간이 더 흐르자 역전되어 할아버지가 여러 점 놓고 두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내 바둑의 첫 스승이자 내가 가장 많은 대국을 함께한 바둑 친구였다. 초등ㆍ중학교 시절, 여름방학이면 더위를 피해 바둑판을 들고 동네 어귀의 나무 그늘 쉼터에 가곤 했다. 그러면 지나가던 엿장수도 바지게를 받쳐 놓고 쉬면서 가끔 훈수를 두었고, 논의 물꼬를 보러 나온 동네 어른들도 같이 앉아 구경하며, “조손(祖孫) 간에 보기 드문 좋은 모습”이라고 입을 모았다.
우리는 바둑을 두면서 10원짜리 동전 하나씩 걸고 내기를 했다. 그 시절 10원은 어린 나에게 꽤 큰 돈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손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어린 손자를 이기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셨다. 어느 날 바둑이 다 끝나고 새로운 판이 막 시작되고 나서 할아버지가 자세를 고쳐 앉을 때였다. 그 순간 할아버지 무릎 밑에서 내 바둑알이 수북이 쏟아져 나왔다.
약간 당황한 할아버지는 “거기에 있는 줄 몰랐다”며 돌려주셨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따낸 내 바둑알을 무릎 밑에 감추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많이 이기거나 졌을 때는 그대로 두고, 계가(計家) 바둑(쌍방의 집수를 비교)일 때에만 꺼내서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할아버지만의 비장의 카드였던 셈이다. 때로는 바둑알을 담을 때 내 바둑알도 슬쩍 몇 개 챙겨 가셨다. 내가 강하게 항의하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나도 거기에 있는 줄 몰랐다”며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셨다. 그리고 내기에서 이겨 딴 돈도 돌려주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을 테니 언제든지 이겨서 찾아가라”고 하셨다. 평소 점잖고 인자하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와의 10원짜리 내기 바둑에서 이기려고 갖은 꼼수를 쓰고도 끝까지 부인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던 천진했던 모습은 지금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부산에 살 때, 주말을 이용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시골 본가를 찾을 때면 틈틈이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었다. 일요일 오후 늦게 집을 나서려 하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가기 전에 바둑 한 판만 더 두고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 한 판이 한 판으로 끝날 리 없었다. 빨리 두어 두 판만 두고 한 판은 져 드리자고 생각하며 시작해도 막상 바둑을 시작하면 그렇게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지면 언제나 하시는 말씀은 한결같았다. “내가 욕심이 많아서 너무 많이 이기려고 하다가 졌다. 조금만 이기려고 하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으니 한 판 더 두자.” 나는 할아버지보다 실력이 뛰어났기에 내 승부욕만 조금 내려놓으면 승패의 균형을 맞출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지 못해 바둑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새 일곱, 여덟 판까지 두게 되어 밤늦게 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가 최고령이 되자, 예전처럼 할아버지를 찾아와 바둑을 두는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가끔 들르는 손자인 내가 거의 유일한 바둑 상대가 되었다. 지금에야 할아버지와 바둑을 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효도였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할아버지와 바둑을 더 많이 두고, 내가 좀더 많이 져서 할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을 텐데……”
할아버지의 바둑 친구들 중에서도 유난히 기억에 남긴 두 노인이 있다. 한 분은 같은 동네에 살던 수염을 길게 기른 분으로 우리 할아버지보다 나이가 좀 적었다. 그런데 두 분은 바둑을 둘 때마다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그 원인은 그 노인이 바둑을 물려 달라고 조르거나 변칙을 썼기 때문으로 기억한다. 심하게 다투다가 결국 삐쳐서 중간에 바둑돌을 던지고 집으로 가버린 적도 가끔 있었다.
그러나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찾아와 바둑을 두곤 했다. 그 노인은 우리 할아버지보다 훨씬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이후로 할아버지는 단골 바둑친구가 없어졌다. 또 한 분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병풍을 만들어 주고 생계를 이어가던 유랑 노인이었다. 두 분이 만나면 밤을 새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한 번은 아버지가 두 노인의 건강을 걱정하여 한밤중에 두꺼비집 전원을 내려 정전 상태로 만든 적이 있었다. 불이 꺼지면 두 분이 바둑을 멈추고 주무실 줄 알았는데, 예상은 빗나갔다. 두 분은 정전이 되자마자 촛불을 켜고 다시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낮에 잠깐 눈을 붙이고, 식사도 서둘러 마친 뒤 다시 바둑판에 앉곤 했다.
그렇게 바둑 삼매경에 빠진 두 분의 그 치열한 레이스는 떠돌이 노인이 다음 일정으로 다른 마을로 떠나야만 비로소 끝이 났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했는데, 그 신선놀음이 바로 바둑 아니던가.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노인은 할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마도 세상을 떠난 것이리라. 지금도 할아버지가 머물던 방의 선반 위에는 그 노인이 만든 병풍이 남아 있다. 그 병풍을 볼 때마다 바둑에 심취해서 즐거워하셨던 두 노인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1919년 4월 2일 언양장 독립만세운동 주도한후 65년간 비고장(備考帳) 보관
할아버지(이종능 李鍾能)는 비록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촌부였지만, 19세 때에 천도교에 입교한 후 평생을 한결같이 신앙인으로 꼿꼿하게 모범적인 삶을 사셨다. 할아버지의 주요 읽을거리는 천도교 경전인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천도교 기관지인 신인간(新人間) 등이었지만 늘 책을 가까이 하셨다. 잠들기 전까지도 소리 내어 책을 읽으셨고, 나는 할아버지의 그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할아버지는 1919년 4월 2일, 언양장날에 있었던 독립만세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 고향마을인 울주군 상북면 거리(당시 행정 지명은 울산군 상남면 거리)에는 1910년에 천도교 울산교구가 건립되었고, 당시 25세였던 할아버지는 천도교 교인이었다. 김교경 교구장의 지시를 받고 서울에 가서 그가 필사한 독립선언서를 가져왔으며, 거사 당일에도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다행이 피신하여 옥고는 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야기는 울주군 상북면 출신 소설가 강인수 님이 1988년 7월, 부산문학에 발표한 단편소설 「새벽 하늘」에도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할아버지는 학준(호적상 이름)이라는 주인공으로 그려졌다. 또한 울주군 상북면 행정복지센터 뜰에 건립된 삼ㆍ일독립운동기념비에도 언양 독립만세운동 주도자의 한 사람으로 할아버지 이름, ‘이종능’이 새겨져 있다.
할아버지는 또한 1913년 이후 천도교 울산교구 상황을 비망록 형식으로 기록한 문서인 「비고장(備考帳)」을 보관하여 귀중한 독립운동의 자료를 후세에 남겼다. 그 비고장의 분량은 총 39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성금 모금 상황이 21면, 3·1독립선언서 필사본이 8면,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독립신문과 국민회보에 실린 내용의 필사본이 10면을 차지하고 있다. 비고장에는 5회에 걸쳐 성금을 헌납한 연인원 189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그 자금은 종교적 목적뿐만 아니라 상당한 금액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되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1984년 8월, 사학자 고 이현희 성신여대 교수는 할아버지(이종능 李鍾能)와 후배 천도교인 이갑종(李甲鍾) 님을 방문해 비고장이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손에서 보관되다가 이갑종 님에게 전달돼 보관 중임을 확인했다. 이 교수는 이 문서를 빌려 연구한 후, 자신의 저서 「동학혁명과 민중 東學革命과 民衆」 하편에서 관련 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그는 책에서 “3·1독립선언서의 필사는 3·1독립운동 당시의 원본 그대로 보관돼 있다는 면에서 매우 귀중한 독립운동 자료의 백미인 것이다. 1919년 기미년 삼일독립운동 이후 65년간이나 고이 간직해 온 이종능·이갑종 두 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표한다”라고 기록하며, 이 문서의 역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이후 비고장은 또 다른 후배 천도교인 이철우 님을 거쳐, 김교경 교구장의 손자인 김용경 부산대 교수에게 전달되었고, 2014년 8월 6일 부산대학교에 기증되었다.
103세 때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선택
할아버지는 1995년에는 KBS 1TV <6시 내 고향> 프로그램에 건강한 100세 노인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그 한 달 전, 하나뿐인 아들이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쓰러졌다. 당시 나는 시중은행 일본 오사카지점에서 주재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그때가 마침 ‘IMF 외환위기’로 금융기관 해외지점이 경쟁적으로 문을 닫던 시기였고, 내가 근무했던 지점도 폐쇄 대상이어서 피를 말리는 긴장 속에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아버지의 위독한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해 입원 중인 아버지를 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셨다는 듯, 그날 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급하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웃 마을 고모댁에 모셔다 놓은 할아버지를 뵙고 가면서도 아버지의 사망 소식은 알리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집에 가서 아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하셔서 집으로 모시고 왔고, 결국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나이를 묻고, 75세라는 대답을 듣더니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때부터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다.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선택한 할아버지의 결기는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의학적인 생명 연장 시도도 모두 무의미했다.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손자인 내가 언제 오는지 계속 물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예정된 귀국 날짜를 며칠 앞두고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렇게 한 달 사이에 아버지와 할아버지 두 분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자식을 앞서 보낸 한없는 슬픔을 삭이며, 노쇠한 자신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극단적인 선택’이 아닌 ‘존엄한 죽음’으로 두 세기에 걸친 삶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입춘이 지나 눈발이 날리고, 세찬 바람이 휘몰아 치는 날, 죽음을 소재로 한 소설 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읽으며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반 일리치는 명문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순탄하게 법조인의 길을 걸으며 안락한 삶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몸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부정하고 가족을 원망했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이 추구해온 편안하고 안정된 삶이 실은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 찼고, 물질적인 행복을 정신적인 행복으로 착각했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죽기 한 시간 전이 되어서야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것을, 그의 삶이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바로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고,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
누구나 존엄하게 죽기를 희망한다. 죽음보다 어려운 것이 삶이라고 했다.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 죽음은 나와는 무관한 일도, 먼 훗날의 일도 아니다. 죽음이란 누구나 외면하고 싶지만 결국 삶의 유일한 진실이기도 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에게는 아직도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다. 결코 늦지 않았다.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