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개월간의 멸치잡이 한철 장사로 일 년 먹고살기도

[주말ON-정은영의 신다방열전] 44. 방어진 비목다방(2) 초겨울이면 전국 1만8천여명 선원 집결 기상악화에 배가 못 나가거나 멸치 가득한 만선으로 들어왔을 땐 선원들 다방에 점령 발 디딜 틈 없어

2025-04-10     정은영
철 보다 일찍 도착해 준비 작업중인 멸치잡이 어선들.  정은영 제공

방어진은 다방영업이 재미가 있는 계절이 있다. 멸치잡이 파시가 형성되는 시기인데, 계절적으로는 초겨울부터 이듬해 초봄까지다. 다시 말해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이다. 이때가 방어진은 멸치잡이 철이다. 

 멸치잡이 철이 되면 방어진항으로 전국의 멸치잡이 배들이 몰려든다. 약 1만 8,000여 명의 선원이 방어진 앞바다에서 멸치를 잡는다고 한다. 그중 외국인 선원이 8,000여 명이다. 외국인 선원들은 다방영업에 크게 존재가치가 없다. 이유는 다방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어서 배가 출항하지 않는 날에도 이들은 숙소에 머물면서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하는 구두쇠이다. 

 매출은 국내 선원 1만여 명이 올려주는 것이다. 이들이 다방에 오는 때가 있다. 기상악화로 배가 출항하지 않을 때와 만선으로 입항할 때다. 기상악화로 배가 출항하지 못할 때는 씀씀이가 거의 없다가도 배가 만선으로 입항하고 났을 때는 다르다. 다방에 와서 돈을 쓰면서도 여유가 있다. 선원들이 몰리는 멸치잡이 철에는 방어진 다방 어디를 가도 앉을 자리가 없다. 

 상상해보라. 방어진항 주변에 1만 8,000여 명이 몰려들었다고 하면 디자인 거리에도 사람들이 넘칠 것이다. 약 5개월간 계속되는 방어진 앞바다 멸치잡이 시기는 나머지 7개월간 그냥저냥 이 지역 다방들이 살 수 있도록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방어진 다방은 5개월 영업하고 7개월 쉰다는 말이 정답이다. 다방들이 쉽게 문을 닫지 못하는 것도 멸치잡이 5개월의 단맛을 알기 때문 아닐까 한다.   

 

울산 동구 방어동에 위치한 비목다방. 정은영 제공

 

비목 노래 세상에 탄생하게 된 배경

비목 작사가 한명희와 작곡가 장일남은 한명희 선생이 전방에 근무하던 시절 그의 증언이다. 

 어느 날 나는 그 격전의 능선에서 개머리판은 거의 썩어가고 총열만 생생한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전쟁 당시 M1 소총이 아닌 카빈총의 주인공이면 물론 소대장에 계급은 소위였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 같은 20대 한창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일무(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군 제대 후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 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 가곡을 위한 가사 몇 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릿속에 스치고 간 영상이 다름 아닌 그 첩첩 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나는 이내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 녘의 이름 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 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 따라 순절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당시의 단편적인 정감들을 내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보는 작업이기에 아주 수월하게 엮어갔다.

 비목이 세상에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비목을 작사한 한명희 선생은 1939년 충청북도 충주 출생이다. 그리고 장일남 선생(한양대 음대 교수 역임, 2006년 작고)이 곡을 붙임으로 노래는 생명을 얻었다. 

 

비목다방 실내. 정은영 제공

 

매립 후 사라진 옛 방어진 방파제

방어진항 매립 이전, 즉 사라진 옛 방어진 방파제는 펄떡이는 횟감들이 어선에서 바로 내려지던 곳이다. 시민들뿐만 아니라 이 방파제의 명성을 아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찾아왔었다. 그러나 방어진항 정비사업으로 옛 방파제는 흔적 없고 푸른 물결만 출렁인다. 

 당시 방파제는 회를 썰어주는 함태기 아주머니들과 손님들이 뒤엉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바다로 미끄러질 수도 있었다. 그때가 방어진 끝자락 비목다방의 호시절이었고 비목다방 매출이 방어진 들머리 시외버스 인근 다방들보다 높았다.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커피가 식었다. 잔을 밀쳤더니 주인이 “따뜻한 커피 한잔 더 드릴까요" 했지만 사양했다. 처음부터 커피를 마시러 온 것은 아니었다. 선풍기를 켜지 않았다. 대신에 열어놓은 비목다방의 창문으로 소금기 가득한 해풍이 불어왔다. 11월 초순이지만 한낮 기온은 아직도 여름인가 할 정도로 제법 뜨겁다. 불어오는 끈적한 해풍에 몸을 맡기니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게로 내려앉는다. 잠시 졸았다가 깨었다. 살짝 꿈에서라도 옛 방파제 풍경이 그려졌으면 했지만 허사였다. 그 시간에도 사장님은 여전히 빛났던 방어진 선창의 한때 추억을 말하고 있었다. 

선원들 몰려들면 다방 레지들도 따라 몰려

11월은 비목다방 사장님이 말한 멸치잡이 철의 시작이다. 내년 3월 말까지 5개월간 방어진은 여관방을 구하기가 쉽지가 않다. 1만 8천여 명의 선원들이 방어진항 일대에서 북적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선원들이 몰려들면 다방 레지들도 선원들의 꽁무니를 따라 몰려든다. 어선의 어군탐지기가 멸치 떼를 탐지하듯 레지들도 선원들이 방어진으로 몰려들 것을 이미 탐지하고 있을 것이다. 영리한 아가씨들은 미리 방어진 지역의 숙소를 구한다고 한다.

 멸치잡이 철이 되면 방어진항도 이중삼중으로 배를 접안시켜야 할 만큼 복잡하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5개월이 나머지 7개월 먹고 살아야 한다. 다방들도 모처럼 때 빼고 광내느라 바빠진다. 구석구석 닦고 쓸고 꽃단장에 한창이다. 주인들은 이웃다방보다 좀 더 이쁜 레지 아가씨를 구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레지 아가씨의 미모가 영업에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은근히 이웃다방 레지 아가씨 미모가 신경이 쓰이는 사장님도 있다.

 기상악화로 어선들이 출항하지 못하는 날 선원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다. 이런 날 선원들이 옛 단골 다방을 찾아오게 만드는 것은 순전히 다방 사장님들의 수완이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

 지난 4월 멸치잡이 철이 끝나고 방어진을 떠나는 선원들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한 다방들은 멸치잡이 철이 시작되자 마자 단골들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느긋하다. 그러나 인심이 야박하다고 소문난 다방들은 스스로 전전긍긍이다. 오직 레지들의 영업 수완에 기댈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비목다방 사장님은 느긋한 표정이다. 아마도 넉넉한 인심이 밑천인가 보다.

 비목다방을 나오면서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의 전장 터는 분명 아니다. 그런데도 비목이라는 다방 이름으로 한동안 심란했던 것은 사실이다. 가서 보니 별것 아니더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어쨌거나 울산에서 그것도 방어진항 방파제 나가는 길, 끝머리에 비목다방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의문 사항으로 남겨둔다. 비목으로 다방 이름을 지은 이유를 알건 모르건 간에 다음에도 방어진에 가면 비목다방에 들러서 삼삼삼 커피 한잔 마시고 와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 아닐까 한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