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Japan Town, 염포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2025-06-29     김잠출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연오랑세오녀 전설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4년(157년)의 기록이니 꽤 이른 시기부터 신라의 동해와 일본 간에 왕래나 이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또 석우로(昔于老) 열전 등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왜의 침략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 울산과 가까운 감포의 '동해구'도 그 증거 중 하나이다. 

 신라가 외부 도래인과 조우한 항구로 가장 먼저 기록된 곳은 양남 하서리의 아진포이다. (삼국유사 기이 탈해왕) 석탈해가 수로왕에게 패해 경주로 도망갈 때 울산 바다를 지나갔다. 박제상은 울산 율포에서 배를 띄웠고 미사흔은 귀국길에 울주 범서 굴헐역에서 백관의 영접을 받았다. 처용설화와 8세기 이후 아라비아 상인들의 내왕까지 고대 울산항은 신라의 중요한 외항으로서 출입항의 기능을 다 했다. 

 염포는 일본인이 편하게 내왕할 정도로 가까운 항로상에 있었다. 울주지주사 이은이 왜구에 납치되어 끌려간 사실과 아전 이예의 추적 기록은 왜와 울산이 평시에도 쉽게 오갔음을 웅변해준다. 염포에 거주한 왜인은 1420년 세종대에 10호였다. 1436년 96명을 돌려보냈는데도 해마다 증가했다. 1466년(세조 12년) 경상도 관찰사가 조사한 염포 거주 항거왜인은 36호(삼포 거주 1,650여명)였다가 1475년엔 34호(128명)로 남자 42명 여자 43명 승려 1명과 1곳의 사찰이 있었고 이 해에 13호를 대마도로 돌려보냈다. 1494년엔 51호 152명이 염포에 거주했고 사찰과 승려는 없어졌다. 성종 대에 이르러 염포에 왜인의 선박이 15척이나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1637년 6월 29일 방어진에 표류한 왜선을 돕고 송환했다는 예조의 서계. 김잠출제공

 

염포 왜관은 삼포 중 가장 늦게 지정되었고 사신 접대용으로 설치된 왜관이다 보니 규모가 크지 않고 협소해 연회용 상이나 그릇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의 사신이 와도 성 밖의 사찰이나 항거 왜인의 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1417년 10월 22일, 태종은 염포에 만호를 설치해 방어력을 강화하는 한편, 왜관 설치를 건의받아 1418년 염포와 가배량에 왜관을 설치해 삼포 왜관 체제를 완성했다. 염포를 통해 우리의 차 문화를 일본에 전했다는 설은 특기할 만하다. 경주 용장사에 있던 매월당 김시습이 염포에 와서 외교승 준(俊)에게 초암다도를 전해주고 이 인연으로 일본 전통 다실인 초암다실이 1465년에 지어졌다는 주장이 있다. 염포 왜인들의 행패도 더러 있었는데 1414년 8월 7일(태종 14년) 염포 거주 왜인 105명이 난동을 부렸다. 자신들이 요구한 범종을 제때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칼을 뽑아 울주 사람을 찌르고자 위협했다. 그리고는 왜선을 타고 도주했다.

 1426년 왜관이 재설치 되면서 염포에 일본인의 정식거주와 무역을 허가했다. 이후 흥리왜인의 유입이 점차 늘어났다. 1430년 부산포·염포에 대마도와 왕래하는 일본선 20여 척, 왜관 상주 왜인 100여 명(남녀 포함)이 활동하고 있었다. 교역품을 보면 1451년 일본 이키섬 사신에게 염포 왜관이 쌀 10석, 콩 10석, 면주 4필, 정포 38필을 제공한 사실이 있어 당시의 왜의 수입품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왜의 사절은 염포에 상륙해 언양·경주·안동을 거쳐 서울로 가도록 정해져, 염포는 좌로(左路)의 시발지였다. 삼포 개항 당시 염포의 왜인 수를 60명으로 한정했는데, 1494년엔 150명이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120여 명이 상주했다. 삼포왜란에 이어 1512년 임신약조 체결로 염포의 왜관은 폐쇄되었다. 

 왜관은 왜의 사신이 배를 대는 곳이자, 사신들을 위한 연회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삼포의 왜관이 다 그랬듯이 교역이 이뤄지는 장소이면서 관에 장부를 두어 명기했을 정도로 유녀(遊女)도 드나들었다. 그래서 초기 왜관은 '작은 일본인 마을' 즉 Japan Town이란 비유가 틀리지 않는다. 당시 왜인 집단은 상주 왜인과 장사를 하며 이익을 챙기는 흥리왜인, 사절인 사송왜인, 조선의 관직을 얻은 수직왜인, 귀화한 향화왜인 등으로 나뉘는데 이들이 뒤섞여 염포를 드나들며 장사하거나 상주를 했다. 외교와 상업, 무역과 문화교류는 물론 인적교류가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으니 염포는 단순한 왜관이나 한갓 바닷가 마을이 아닌 재팬타운이었다. 고려말부터 왜구의 피해가 많았던 염포가 조·일 교역을 위한 관문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