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조선인 축살 사건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927년 10월 17일 월요일 오후 3시. 언양 장날이었다. 가을 햇살이 좋았고, 장터는 언양과 서부 5개 면, 경주와 밀양 양산 청도 등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상북면 등억리 산골에 사는 김경도(34세)도 한 대목 보려고 숯을 한 지게 지고 장터에 왔다. 오전에 숯을 다 팔았으니, 기분이 좋았다. 점심을 먹고 장터 옆 동부리 180번지 가게 앞에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성냥이 없어 길 건너 가게에 다가가 주인 가리야(刈屋益槌)의 부인에게 성냥을 청했다. "담배 피우게 성냥 한 개만 빌립시다" 그러자 가리야의 부인은 "돈 주고 사라"며 쏘아붙였고 일본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이에 김 씨도 맞대응하며 실랑이를 벌였다. 가게 주인 가리야가 안에서 뛰어나왔다. 다짜고짜 김 씨의 뺨을 때리고 밀어뜨린 뒤 게다를 신은 발로 김씨의 급소에 '사커-킥'을 날렸다. 김 씨는 정신을 잃고 졸도했다. 이를 본 정인섭의 아버지 정택하가 다개리 의사 이종호를 청해 침을 놓고 겨우 살렸다. 깨어난 김경도는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해, 같이 온 사람에게 업혀 집으로 갔다.
김 씨 가족은 이튿날 언양면에 있는 일본인 의사 하야시다를 불렀고 왕진 온 의사는 환부에 약을 바르고, 소변을 빼내더니 "걱정할 거 없다"며 돌아갔다. 그 뒤 일본인 의사는 제대로 치료를 해주지 않았고 고소를 위해 요청한 진단서조차 거절했다. 차도가 없던 김경도는 사건 발생 5일 뒤에 사망했다. 형이 언양주재소에 고소한 직후였다.
이른바 '일본인의 조선인 축살(蹴殺) 사건'은 삽시간에 언양과 울산 일대에 퍼졌고 사람들은 분노에 가득 차 치를 떨었다. "불 좀 달랬다고 사람을 걷어차 죽이다니!" 분노한 언양 주민들은 단순 폭력 사건이 아닌,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의사의 사망진단도 엉터리였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일본어 신문 보도가 민족 차별투성이였기에 더욱 그랬다. 언양 청년회와 상남·하북 청년회는 22일 밤 8시 언양 청년회관에서 연합회의를 열고 진상규명과 가해자 성토, 피해자 유족 구조 등을 결의했다.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적으로 대응에 나선 것이다.
부검 결과 김 씨의 사망 원인이 가리야의 축살 때문으로 결론이 나 10월 23일 오후 6시 울산 경찰이 가리야를 체포해 구금했다. 재판정에서 가리야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징역 5년이 구형되었다. 사건 발생 3개월여 뒤인 1928년 1월 27일 부산일보는 '가리야에게 징역 5년 구형, 판결은 오는 31일'이라고 보도했다. 유족은 부산지방법원에 위자료 및 손해료로 부인 박말순에게 3,780원, 장녀에게 4,160원 등 총 8,540원을 가리야에게 청구했다.
당시 일본인의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축살 사건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언양의 조선인 축살 사건은 민족 차별에 대한 항의, 지역민의 분노와 비난 여론이 한데 뭉쳐지면서 언양의 청년이 중심이 돼 전국으로 확산시킨 사례였다. '악독한 왜노, 우리 동포를 차서 죽였다'라는 분노였다. 언양 주민들은 사건을 알리는 선전지 4,000장을 뿌리고 시민 규탄대회를 계획했다. 선전지에는 "조선 소년들아! 일본인을 타도하여 조선을 회복하자! 조선독립만세!"라는 글이 태극기와 함께 실렸다. 민족지 동아일보는 '악독한 일본인 조선인 축살? 불 좀 달란다고 차서 죽여, 가해자는 유족이 체포'(1927.10.29.)라고 보도한 반면 친일지 부산일보는 가해자를 비호하고 축소 왜곡해 시민사회단체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재판까지 24건의 신문보도가 있었다.
일본 야마구치현 출신인 가리야는 35세 때인 1911년 7월, 언양에 온 '1호 일본인 이주자'였다. 사건 당시 언양에는 일본인 9가구 36명이 거주했다. 가리야 부부는 동부리에서 잡화상과 숙박업을 했다. 사건 8년 뒤, 1935년 가족과 함께 언양을 떠났다.
언양은 1919년 4월 2일 울산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천도교와 기독교인 등이 합세해 이끌고 장터에 모인 모든 조선인이 호응했다. 언양은 일제 강점기 소년운동과 청년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이었고 가장 먼저 항일, 반일 운동이 일어났고 가장 강렬하고 치열했던 지역이었다. 이런 전통 속에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축살 사건이 나고 민족 차별까지 더하니, 언양은 다시 들끓었고 다시 봉기했다.
선사시대부터 빛나는 이름이었던 언양. 만세운동을 비롯해 청년 소년 운동, 민족 차별에 맞서 항거한 것까지 언양이기에 가능한 분노였고 저항이었고 기록이었다. 과연 '울산의 심장-언양'다웠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