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절벽길 올라 만나는 '요정의 초원'

[주말ON-파키스탄, 일샬라] 3.실크로드 거점도시 길기트(Gilgit)

2025-09-04     이서원
숲속의 요정 작은 연못에 투영된 낭가파르바트. 이서원 제공

버스로 19시간 달려 드디어 도착  

어제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에서 출발한 지 꼬박 19시간이 지나서 드디어 이 나라 끝자락의 가장 큰 도시 길기트(Gilgit)에 도착했다. 밤새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잠을 설쳤던 터라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비행기도, 배도 아니고 버스로 이렇게 긴 장거리 여행을 누가 감히 해볼 수 있겠나.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길기트의 첫인상은 내 몸보다 더 지쳐 보였다. 버스에서 짐을 챙겨 내리자 택시 기사는 용케도 따라와 나의 짐을 벌써 들어 옮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사방이 돌산으로 아직 눈이 녹지 않은 채 분지 가운에 앉은 도시, 꼭 내 처지처럼 동그마니 처연하다. 기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어서 승차하라는 시늉이다. 그래 어디든 가보자. 우선 짐을 풀고 찬물에 샤워라도 한바탕해야 정신을 차릴 것 같다. 언젠가 책에서 본 여행객의 천국이라는 게스트하우스 "마디나(Madina)"를 가자고 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먼지 폴폴 날리는 시내를 몇 바퀴 돌아 숙소에 내려 주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푸르게 자라고 있다. 우리 돈으로 하루 숙박료가 4만원이란다. 전기도 있고, 화장실도 실내에 있으며 더군다나 더운물도 나온다고 직원은 친절하게 안내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호텔을 기대한 건 처음부터 아니었으니 여장을 풀었다. 온몸이 설산의 눈 녹는 것처럼 풀어진다.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니 어둠이 서서히 내린다. 작은 초승달이 서산에 걸려 넘어가기 직전이다. 마당 의자에 앉았다. 숙소 처마 아래 각 나라 국기가 만국기처럼 걸려있다. 우리나라 국기가 내 정면에 있어 혼자 웃었다. 그 옆에 북한 인공기도 나란히 있다. 조금은 마음이 허전하지만 언젠가는 사우스코리아, 노스코리아로 소개할 게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인 코리아로 통일될 날을 기대했다.

 천천히 걸어서 시내로 가보기로 한다. 비포장길로 먼지는 엄청나게 날리지만, 화덕에 난(빵)을 굽는 가게, 거리에 앉아 신발 수선하는 할아버지, 과일가게, 파리가 들끓는 닭집 등 시내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동양인을 보기 드물었을까. 나와 눈만 마주치면 웃으며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자며 금방 친숙하게 내 어깨에 팔을 얹는다. 수염은 더부룩하게 자랐지만 모두 친절하고 꾸밈없는 천진한 아이 같았다.

길기트 시내의 풍경. 이서원 제공

1300년 전 혜초스님·고선지 장군도 다녀간 곳

길기트는 예로부터 사통팔달 교통의 중심이다. 그리고 군사요충지이며 특히, 카라코람산맥의 해발 1,500m에 있는 힌두쿠시산맥과 카라코람산맥 사이로 흐르는 인더스강, 길기트강이 합쳐지는 곳에 있다. 북으로는 중국, 동쪽으로 티베트,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도 연결되어 있다. 예전에는 실크로드 상인들이 이곳에서 쉬어가며 자연스럽게 거점도시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특히, 우리가 잘 아는 '왕오천축국전'을 지은 혜초스님과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 장군도 1300여 년 전에 이곳을 다녀갔다고 전해지지만 아마, 혜초스님은 이곳을 다녀갔다기보다 이 도시를 듣고 서술했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한때는 불교가 번성했지만, 이슬람교에 밀려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혜초스님이 다녀갔던 듣고 기술했던 길기트가 그 당시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해질 만큼 번성했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고선지 장군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의 장수가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20세에 장군에 올라 747년에 이곳에 원정으로 와서 승리하며 파미르고원 동쪽 지역인의 향당 세력을 제거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중국영토로 되어있을 만큼 고선지 장군은 실크로드의 호랑이라고 할 정도로 대단한 장수였다.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면 길기트가 단순히 낯선 도시만은 아니것 같아 친근함마저 생긴다. 세 발차, 이륜차, 소형차들이 왕래하며 거리의 질서라곤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고함치거나 삿대질하는 사람이 없다. 저마다 제 길을 가는 무질서 속의 규칙이 나름대로 정립된 듯하다. 젊은 친구들이 운영하는 작은 점포에서 난을 하나 샀다. 우리 돈 250원이다. 따뜻한 난을 뜯어 먹으며 아이처럼 골목길을 걸어 마치 어린 시절의 집을 찾아가듯 그렇게 타박타박 타국의 숙소로 돌아갔다.

타토마을 사람들이 만든 천길 낭떠러지길. 이서원 제공

천상의 고원 페어리 메도우로 가는 험난한 여정

편안한 잠을 자고 일찍 깨었다. 마당을 어슬렁거리자 직원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오늘은 어디로 갈 거냐는 뜻이다. 내가 다시 "어디로 가는 게 좋아요?"라고 되묻자 그는 낭가파르바트로 가 보란다. 거기에 가면 "숲속의 요정"이 나올 것이니 요정을 만나면 돌아오지 말라며 크게 한바탕 웃는다. "오! 요정이 거기에 있다고? 당연히 나는 내일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다" 다시 크게 웃으며 우린 금방 친숙한 사이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살파즈 폰(Sarfarz fon)이란다. 매우 친절했다. 언제나 먼저 인사를 했고 무거운 짐을 말없이 들어주었다. 그리곤 농담도 잘하고 몸을 흔들어 춤을 추며 제 끼를 발휘하기도 했다. 흔쾌히 나도 막춤을 추며 그의 손을 잡자 탱고처럼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마당에서 하나가 되었다. 

 약간의 간식과 침낭 등을 챙겨 들고 택시를 탔다. 약 1시간 40분을 달려 라이코트 브리지(Raikot Bridge)에 도착했다. 여기서 타토(Tato)마을까지는 마을주민들이 운영하는 지프를 타야만 한다. 이곳 사람들은 조직적으로 30년 전부터 문명과의 연결을 위해 자체적으로 길을 만들었다. 변변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삽과 곡괭이, 지렛대와 망치가 전부였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고 수천 미터의 높은 절벽을 칼로 도려내듯이 깎고 돌을 쌓아 9㎞의 길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으로 완공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 도로를 지구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도로로 선언했다고 할 만큼 위험천만한 도로다. 그러나 나는 오로지 요정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희망에 부풀어 기어이 올라가 보기로 했다. 타토마을까지는 주민들이 독점으로 자치 운행권을 갖고 지프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지프에 올랐다. 천 길 낭떠러지 옆으로 딱정벌레처럼 차는 굉음을 내며 올라간다. 토끼가 간을 바다에 두고 왔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내 간도 지금 저 아래 두고 왔으면 좋았으련만, 차마 눈뜨고 절벽 아래로 바라볼 수가 없다.  

세계 9위로 높은 낭가파르바트 설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은 필자. 이서원 제공

낭가파르바트 설산이 주는 매력에 또 한번 감탄

30여 분을 달려 드디어 타토마을에 닿았다.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혼자 걸어서 가거나 말을 타고 가야만 한다. 말로만 듣던 낭가파르바트(Nanga Parbat·세계에서 9번째로 높은 산봉우리)가 저 앞에 보인다. 전나무와 삼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오른다. 날은 덥고 햇살은 뜨거웠지만, 저 설산이 주는 매력은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도도하고 웅장했다. 두어 시간을 올라 마침내 숲속의 요정이 산다는 페어리 메도우(Fairy Meadow)에 올라섰다. 눈부신 광경, 함성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초원에 털썩 주저앉았다. 독일의 등반가들에 의해 명명된 "숲속의 요정"은 조금의 의심이나 허구가 아님을 금방 알겠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풍경! 천천히 그리고 아주 의미심장하게 다시 발끝에 힘을 주었다. 3,300m의 이 높은 곳에 이토록 충만한 초원이 있을 줄이야! 많은 낭가파르바트 트레커들은 제1차 베이스캠프인 여기서 짐을 정리하고 정상을 향한 내디딤의 힘찬 결의를 다지기도 한다. 아름다운 천상의 고원, 자그마한 벤치에 앉아 저 도도하고 기가 막힌 설산의 정상을 바라보는 것은 일생일대의 행복이며 희열이었다. 

 고산증으로 머리는 아프지만, 모닥불을 지피고 삼나무가 타닥타닥 타는 밤에 늦도록 별을 보는 일, 작은 호수에 비친 달빛과 더불어 나를 반추하는 일, 조랑말이 흔드는 워낭소리에 내 눈물이 맺히는 일! 이보다 더 거룩한 여유로움을 세상 어디 가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다. 

 이 순간은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다. 8,125m의 세계 제9봉이 오롯이 담긴 연못가에서 세상의 문명과는 동떨어진 채 자기들만의 풍경을 간직하며 사는 이들이 부러웠다. 요정은 저 숲속에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동행하고 있음을 알겠다. 순수한 영혼을 담고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의 저 하얀 자태를 깊이깊이 포개어 두리라. 어느 날 문득 사는 게 힘겨워 지칠 날에 다시 찾고 싶은 페어리 메도우! 너는 진정 때 묻지 않는 순수의 요정과 함께 영원히 빛나고 있을지어다!  이서원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