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해상 의병'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2025-09-14     김잠출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592년 4월 13일에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거침이 없었다. 14일 부산진성, 15일 동래부를 잇따라 함락했다. 다음 목표는 울산. 4월 19일 언양읍성을 점령하고 21일 경주로 가는 길목인 울산 읍성과 경상좌병영성을 모두 침탈했다. 

 울산 병영의 경상좌병사 이각이 도망가고 관군은 달아났다. 울산읍성과 좌병영은 손쉽게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곧바로 4월 23일 울산의병이 창의 거병해 5월 7일 병영성을 습격해 수백 명을 베고, 군기와 군량을 뺏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울산의병은 경주 의병이나 관군과 연합 전투를 했고 개운포와 태화강하구에서 해상전투를 벌였다. '울산의 해상 의병'이란 대목이 예사롭지 않다.

 왜장 가토는 울산 점령 후 곧바로 울산 읍성과 병영성을 허물고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을 쌓아 종전 때까지 이를 교두보로 삼아 저항했다. 1597년과 1598년의 울산성 전투는 동아시아 3국의 국제전으로 확산됐고 최전선이 된 울산은 말할 수 없는 전쟁 피해를 입었다. 서생포왜성에선 3차례 강화회담이 열렸다.

 상무 정신이 뛰어난 고장이었던 울산은 예로부터 육지와 해상의 관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임란 때 왜군은 울산을 해상 보급로로 활용했고, 부산과 일본을 오가는 중계항으로 삼았다. 이 같은 지정학적 이점 활용은 일제강점기에도 반복되었다.

 바다에서 꽃 핀 울산의병들의 해상전은 개운포와 태화강하구가 무대였다. 개운포는 왜군의 베이스캠프인 서생포에서 울산으로 진출하는 길목이다. 의병부대는 초기 보급로를 차단해 적들의 내륙 진출을 저지하려고 했다. 태화강하구는 서생포에서 도산성으로 드나드는 출입구라 이를 차단해 양쪽의 왜군을 격리하고 고립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1592년 9월 10일 '개운포 해전'에서 울산의병은 왜적 100여 명을 베었고 20여 척의 왜선과 교전했다. 불리한 전세를 뒤엎고 기습과 야습 위주의 유격전으로 적의 해상 활동을 교란했다. 특히 왜군의 해상 보급을 차단하고, 육상 의병들과의 연계를 시도하며 항쟁의 거점을 확보한 점은 특기할만하다. 

 의병장은 장희춘(蔣希春)·이응춘(李應春)·이삼한(李三韓)·윤홍명(尹弘鳴)·서인충(徐仁忠)·이계수(李繼秀)·이우춘(李遇春) 등 7명으로 이들을 남영7의장(南營七義將)이라 한다. 1594년(선조 27) 10월 8~9일에 2차 개운포 해전은 능해장(能海將) 이응춘이 지휘했다. 10월 7일에 개운포 영성으로 진을 옮겨 남쪽 수로로 오는 적을 막기로 계획했는데 8일에 갑자기 적의 대선단이 몰려와 종일 싸워 물리쳤다. 9일에 또 적선이 대거 몰려와 고립무원에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전투에 나서기 전 아들 승금(承金)에게 "나라의 은혜를 받았으니 큰 재난을 당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또 다른 해전은 '태화강구 전투'이다. 1593년 1월 28일 적선이 태화강 입구로 몰려온다는 첩보를 접한 유정(柳汀)과 이언춘(李彦春) 연합부대가 언양에서 회군했다. 2월 2일 의병장들은 화공작전을 시행키로 결정, 10여 척 선단을 준비한 뒤 무룡산에 짚과 화목을 쌓아두고 태화강 모래밭에 숯을 묻었다. 2월 6일 밤 동북풍을 이용해 윤홍명(尹弘鳴), 이응춘 부대가 화공작전을 펼치고 연암에 매복해 있던 의병과 태화강가 척후 정찰병, 연포(蓮浦)의 복병들이 협공해 수천 명의 왜군을 수장시켰다.

 1598년 11월 좌의정 이덕형이 "울산 읍민들이 왜적 토벌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보고한 뒤 12월 21일 울산군을 도호부로 승격한 데는 비정규군으로 해전을 승리로 이끈 수군 의병들의 활약도 한몫했을 것이다.

 전쟁을 겪고 나서 비로소 조선에 "민족이 출현했다"라는 말이 있다. 양반으로 상징되는 이전의 민족과 격이 다른 '의병'을 강조한 것이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수령과 양반, 관군은 달아나거나 무너졌지만, 울산의 선비들은 달랐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수행하며 의병을 조직해 노비 천민 평민들과 합심해 나라를 지키는데 목숨을 바쳤다.

 울산의병의 활약상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은 왜성을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첫째이고 지역의 '울산 임란사' 연구도 학계의 공식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엄격한 사료 비판이나 검증보다 개인 문집이나 후손이 미화한 실기류에 치중해 연구 방법은 미비하고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연구 등 이 분야의 보완이 시급하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