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명, 조선 최초 대(對) 서양전 승리자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9세기 조선은 처음으로 서양과 전쟁을 치렀다. 1866년 10월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프랑스군이 침략, 강화도를 점령했다. 조불전쟁 또는 병인양요이다. 임란과 병자호란에 이어 조선이 당한 세 번째 외침이었다. 이때 서구 제국주의의 무력을 처음 접했다.
병인양요의 강화도 전투 중심에 언양 사람 김기명(金沂明)이 있었다. 10월 16일 강화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막강한 화력을 퍼부었다. 이때 양헌수는 화력에서 절대 열세인 우리가 상대를 제압하려면 정면승부는 절대 불리하고 기병 작전뿐이라고 판단해, '어융방략(禦戎方略)'으로 강화도 수복 작전을 세웠다. 달이 없는 야음을 틈타 심야 잠도작전(潛渡作戰)을 전개해 강화해협을 건넜다. 11월 7일 549명의 군사를 정족산성에 잠입시켰는데 초관(哨官·하급이지만 핵심 지휘관) 김기명이 성에 잠입한 후 포수 161명을 지휘해 남문을 굳건히 지켰다. 프랑스군은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왔고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면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접전 결과,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 포함 60∼70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조선군은 전사자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정족산성 승첩'의 주역은 김기명이었다. 양헌수와 김기명은 서양인과 싸워 이긴 최초이자 유일한 조선인이자 조선군 지휘관이다.
승전 후 고종은 논공행상을 가려 포상과 시상, 승진을 지시했다. 1866년 10월 24일(음) 의정부가 "김기명은 적은 수의 군사로 대적하여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성을 나와 추격해서 흉악한 도적을 활로 쏴 쓰러뜨렸습니다. 자급을 더 하고 영장의 이력을 허용하였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국역 비변사등록 251책)
김기명은 1859년(철종 10) 34세에 증광시 무과 병과 151위로 합격해 무관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기록엔 1826년(순조 26)생, 본관은 김해(김녕 김씨의 오기?)이며 거주지는 언양. 부친 김상규는 유학(幼學)이라고 돼 있다. 고종실록에 그의 이름이 6번 등장한다. 무관 인사 기록과 신도 첨사 시절 이양선 침범에 대한 정탐 보고와 퇴치 내용 그리고 동래 감목관 겸 다대첨사 때 해마다 보유 중인 말 숫자와 건강, 출산 등 상태를 파악해 서울에 올린 보고서이다. 김기명은 적은 병력으로 정족산성 승첩을 이끈 뒤 왕의 치하와 시상에 이어 전공을 인정받아 강화도의 중군(종2품 무관직·軍營의 대장)이 되었다. 곧바로 오위장(종2품 무관)으로 승진했고, 이후 웅천현감 신도첨사 충익장 등을 거쳐 1879년 6월 다대(포)첨사가 되었다. 이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세거지였던 고향 삼남 신화리에 살다 고종 1885년(고종 22) 향년 60세로 사망했다.
울주군 삼남면 신화리 마산마을 중간에 1930년에 건립된 '경의재(景義齋)'가 있다. 화계공(華溪公) 김기명의 위패도 봉안해 해마다 음력 4월 15일 제향을 올린다. 통도사 입구 무풍한송로 바위에는 '金沂明'이란 새김 글이 있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서양인과 벌인 전투의 지휘관으로 최초의 승전을 기록한 무관이다. 울산 역사뿐 아니라 서구 열강에 맞선 19세기 역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다. 지금도 세계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트럼프의 관세전쟁 등 전쟁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이는 인류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우리도 언제 전쟁이란 유형무형의 소용돌이에 휩쓸릴지 모를 일이다. 자유와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웠다. 피의 대가며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 즉 전쟁 억지력을 갖춰야 한다. 새삼 자주국방이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말이다. 강한 군대와 첨단무기 그리고 양헌수 같은 전략가와 김기명 같은 지휘관을 보유하면 금상첨화다. 김기명! 그는 평소에 "나랏일을 하다가 죽기를 바랄 뿐"이란 말을 했다고 전할 정도로 사생관이 뚜렷한 군인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런 참 군인을 가지고 있는가.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