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의 풍류가 남은 8경과 구곡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2025-11-02     김잠출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울산의 산과 강, 그리고 정자와 누각은 단순한 자연경관을 넘어 조선시대 사대부 계층의 세계관과 미의식이 투영된 문화적 공간이었다. 고려 말 1342년, 지울주사(知蔚州事) 설곡(雪谷) 정포(鄭誧)가 태화루와 평원각, 장춘오, 망해대 등을 선정해 울산 최초의 '팔경'을 제창했을 때, 이는 지역 풍광의 목록화를 넘어 중국 문인문화의 수용과 토착화의 첫 시도였다.

 8경의 원류는 중국 호남성 동정호 남쪽,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이 만나는 지점의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되었다. 송대(宋代) 화가 송적(宋迪)이 산시청람(山市晴嵐), 원포귀범(遠浦歸帆), 평사낙안(平沙落雁) 등 여덟 장면을 그림으로 정형화하면서, 동아시아 문인들의 보편적 심미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선비 역시 이 틀을 수용하여 단양팔경, 관동팔경, 그리고 자기 고장의 팔경을 선정하며 거주 공간을 문화적으로 재구성했다.

 울산의 팔경은 울주팔경, 울산팔영, 동면팔경, 언양팔경, 이휴정팔경, 방어진팔경, 석계팔경, 입암정팔경, 작천정팔경 등 다양하다. 이는 그냥 중복이 아니라 시대별, 계층별로 경승을 향유하는 주체가 달랐음을 의미한다. 읍치중심의 공식 팔경과 개인 정자를 중심으로 한 사적 팔경이 공존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울산팔영은 지역의 자연지리와 사회경제적 특성을 함축적으로 드러낸다. 성루화각(城樓畵角)- 병영성(兵營城)의 위용, 전함홍기(戰艦紅旗)- 수군 전함에 휘날리는 붉은 깃발, 동봉일출(東峰日出)- 동대산 너머 솟아오르는 아침 해, 강정매설(江亭梅雪)- 태화강가 정자에 내린 매화와 눈, 남포월명(南浦月明)- 처용암과 동백섬에 비친 달빛, 산사송풍(山寺松風)- 함월산 백양사의 솔바람, 조대소우(釣臺疎雨)- 낚싯대를 드리운 노인과 소나기, 염촌담연(鹽村淡煙)- 삼산 염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등 순수 자연경관과 군사시설(성루, 전함), 생업공간(염촌), 종교시설(산사)이 함께 포함되었다. 15세기 울산이 군사적 요충지이자 제염업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백련구곡 중 5곡에 있었던 백련서사(백련정)의 1990년대 모습(울주군 두동면 방리). 김잠출 제공

 

시대가 흐르며 울산의 팔경은 재구성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심원열의 『학음산고(鶴陰散稿)』 등은 각기 다른 팔경을 전한다. 학성과 태화 무룡산 서생 등지의 경관이다. 정치적 변동(읍치 이전), 경제구조 변화(어업의 부상), 문인 개인의 취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전략적 거점으로 새로 부각된 서생포가 추가된 점은 전란이 지역 경관 인식에 미친 영향을 보여준다. 울산에는 반구구곡(盤龜九曲)과 백련구곡(白蓮九曲)이 전한다. 특히 도와(陶窩) 최남복(崔南復, 1738-1817)이 1784년 천전리 방리(芳里)에 정한 백련구곡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백련서사(白蓮書舍)를 짓고 제자를 양성하며 이곳을 성리학적 수양의 공간으로 경영했다. 

 최남복은 정조대 당쟁이 격화되는 시기를 살았다. 그의 은거는 단순한 자연 애호라기 보다 '명철보신(明哲保身)'의 실천이었다. 백련구곡 경영은 정치적 격랑에서 벗어나 학문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지식인의 생존 전략이자 이상 세계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시도였다. 

 '경(景)'이라는 한자는 본래 햇빛(日+京)을 뜻하며, 양(陽)의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음양오행 사상에서 음의 극수인 8과 결합해 '팔경'이 정착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 조합이 아니라 우주론적 세계관이 경관 명명에 투영된 사례다. 구곡은 물이 산을 아홉 번 휘감아 도는 계곡이다. '곡(曲)'은 골짜기다. 음(陰)의 속성을 지녔으니 양의 극수인 9와 결합해 구곡이다. 음양 조화의 원리에 근거한 것이다. 오늘날 SNS를 통한 '핫플레이스' 공유는 과거 팔경 선정과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팔경이 유교적 교양과 철학적 성찰을 동반했다면, 현대의 명소 소비는 시각적 즉시성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울산의 팔경과 구곡 문화가 남긴 유산은 단순한 관광자원이 아니라 지역민의 정신사적 자산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를 향수의 대상으로만 소비하지 않는 것이다.  옛 선비들이 자연 속에서 도를 구하고 시와 그림으로 승화했듯이, 우리 시대 역시 지역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속에 담긴 역사적·생태적 의미를 재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