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울산역, 만주 이민 가는 길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2025-11-09     김잠출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930년대, 조선의 농민들은 굶주림을 피해 고향을 떠났다. 울산의 농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혹한 소작료에 신음하던 그들에게 자연재해와 일제의 수탈은 이중삼중의 재앙이었다. 이 시기 일제는 만주 개척을 위한 대대적인 이민정책을 펼쳤고 울산에서도 많은 농민들이 만주행 이민열차에 올랐다. 이름조차 생소한 땅, 눈 덮인 벌판, 그곳에 희망이 있을 것이라 믿고 가족을 데리고 집단으로 만주에 이민을 갔다. 먹고 살기 위한 엑소더스는 당시 신문기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1929년 가뭄과 1934년 갑술 대홍수 등으로 남부지방은 초토화되었다. 만주이민은 이후로 급증했다.

 '安住處는 어디뇨?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네들' '한동네 40여호가 살길 찾아 만주 유랑, 춘궁은 다가오고 먹을 것 없어' '봄을 등진 눈물의 이민열차 황량한 만주벌로' '잘 있거라 내 故鄕-언양에서 40명 이민' '이별하는 우름소리가 끈일새 업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곰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비극의 현장' 등 신문기사 제목만 봐도 서글퍼진다.

 유곡마을 23호가 1934년 2월5일 먼저 만주로 떠난데 이어 상북면 양등리 주민 40여 호 등이 1934년 24일, 3월 1일에 울산역을 통해 떠났다. 가난은 봄도 허락하지 않았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떠나는 그들, 울산역과 호계역, 밀양역은 만주를 향해 가는 플랫폼이었다.

 1936년 4월 7일 동아일보는 '울산군 하에서도 50호 이민'이라는 기사에서 "울산의 농민들이 호계역에서 우울한 봄 정든 고향 산천을 등지고 멀리 타국으로 떠난다"라면서 "이들에게 고향에 찾아온 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크다"라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이맘때에도 울산군 내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이 먹을 것이 없어 한 끼의 밥이나마 먹어볼까 하고 남만주 벌판으로 울산역에서 출발했다"라고 전했다. 또 "살길을 찾아 허둥지둥 눈물의 길을 떠나가는 이민-농소면 일대에서 1백여명리 호계역을 떠났거니와"라고 보도했다.

 1937년 6월 7일에도 60여 명의 울산 사람들이 울산역을 통해 만주로 떠났고 1938년 봄에도 살길을 찾아 울산 농민 60여 명이 연길행 기차에 올랐다. 이날 역전에는 각 면에서 친지 가족들이 몰려와 이별의 눈물을 흘렸는데도 무정하게도 기차는 기적 소리만 울리면서 떠나갔다.

'만주개척이민, 울산군 내에서 25호' (부산일보 1940년03월15일). 김잠출 제공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울산 농민들의 만주행은 멈추지 않았다. 언양, 삼남, 하서, 두서, 상북… 하루가 다르게 마을이 통째로 비어졌다. 어떤 날엔 60여 명이, 어떤 날엔 10여 가구가 함께 떠났다. 기차는 기적 소리만 남긴 채, 희망인지 절망인지 모를 땅으로 그들을 실어 날랐다. 1936년 5월에 언양 인근에 사는 100여 명이 밀양역에서 만주로 떠났고, 1938년 3월에는 울산 주민을 포함해 경남도 내에서 1,800여 명의 이주민이 요동으로 떠났다.

 남은 자들의 굶주림도 멈추지 않았다. 1939년 9월 언양 주민 수천 명이 살기 위해 산에 들어가 도토리를 주웠다. 도토리 채취자가 격증했다. 해마다 초근목피로 연명해 오던 그들은 익지도 않은 도토리를 캐 입에 넣었다. 땅이 말랐다. 곡식이 타들어 갔다. 남아 있는 자나 떠난 자나 살아남기 위한 사투는 같은 고행이었다.

 "언양지방 五개 면 1만여호의 五,六활이 년년히 초근목피로 잔명을 이어오든바 금년은 특히 미징유의 대한발로서 만곡의 수확기부터 남부녀대하고 유리군이 매일 수십호씩 속출하고 잇으며 일개월 전부터는 익지도 안흔 도토리라도 채취하야 연명이라도 할가하야 매일 수천명의 입산자로 기관을 이루게 되어서며"(1939.09.28 동아일보)

 일제는 만주를 '희망의 땅'이라 분칠했다. 농민을 실은 열차는 '히까리(光·빛)', '노조미(望·희망)'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러나 그 열차는 이별과 단절, 비극과 오열의 상징이었다. 역전마다 솟구치는 울음이, 맨발의 아이들이, 주저앉은 어미가 열차의 문틈에 매달렸다. 먹을 것을 찾아 고향을 등진 이들에게 만주의 봄은 없었다. 연길의 벌판, 요동의 황야, 이름 없는 촌락들은 다시 가난의 거처가 되었을 뿐이다.

 이를 보면 일제강점기 때의 울산역은 단순한 철도시설이 아니라 생의 경계선이기도 했다. 지금 사람들은 그날의 기차를 기억하지 못한다. 당시의 울산역도 이미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래도 역사는 어김없이 기록으로 남는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