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불 지피면 '100일 온기'…천년 구들 아자방의 신비
[주말ON-정은영의 주유천하] 5.지리산 반야봉 칠불사
가을이 절정이다. 집 앞 가로수들이 붉게 물들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찬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어느새 패딩점퍼를 꺼내 입었다. 오늘 길을 나서는 종착지는 지리산 반야봉 아래 칠불사다. 일 년에 한두 번은 가는 인연이 수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다. 출발하는 날이 쾌청하다. 여행을 떠나면서 날 좋은 것도 큰 복이다.
지리산 반야봉 따라 곱게 물든 단풍 절경
지금쯤 지리산이 울긋불긋 오색단풍으로 물이 들었을까. 지난 11월 1일 지리산으로 출발하면서 아름다운 단풍을 볼 것이라 내심 큰 기대를 했다. 최근 가을비가 자주 내리는 바람에 그간 가로수 잎들이 단풍으로 치장할 기회가 없었는데 요 며칠 사이에 일교차가 크게 나면서 하루가 다르게 형형색색으로 물이 들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맘때 날을 잘 잡았다.
기상이변이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날씨가 고르지 않다. 옛날에는 한여름에 우박 내리는 것 정도가 기상이변에 속했다. 지금은 시시각각 변덕을 부리는 날씨에 안절부절못한다. 최근 갑자기 여름에서 가을을 빼고 겨울로 접어들 듯 기온이 뚝 떨어지면서 강원도 일부는 영하로 곤두박질 했다. 파란 잎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대관령은 얼음이 얼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맘때가 파란 잎들에 단풍 물이 화려하게 드는 시기다. 이때를 놓치면, 올해 단풍 구경은 끝이라는 비장함으로 출발한 여정이다. 울산에서 하동 칠불사까지는 약 3시간 30여 분이 걸렸다. 구례 방향으로 가다 화개장터를 지나면서 바로 쌍계사와 칠불사 방향으로 꺾어 들었다. 이 길은 지난 봄날 화려함을 뽐냈을 벚꽃길 옆 가로수들이 혹독한 겨울을 견딜 준비를 하느라 한창 바쁘다.
길옆으로 늘어선 벚나무들도 반야봉 산바람에 전신을 맡긴다. 오늘따라 바람이 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들은 물든 잎들을 떨구기에 바쁘다. 그 풍경을 구경하느라고 차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리산 반야봉에서 시작한 단풍이 화개천을 따라 길게, 그리고 깊게 물이 들고 있었다. 신선의 세계, 선경이 따로 없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 칠불사 아래 주차장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10분 걸어야 한다. 칠불사를 올 때마다 승용차는 경내 주차장까지 들어갈 수 있어서 편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걸어보니 적당한 비탈이라서 걷기에도 무리가 없다. 주차장에서 경내 마당까지 산책길로 다듬어져서 많은 사람이 지리산 즐기기를 하듯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칠불사로 오르는 산책길은 길옆으로 정원을 잘 꾸몄다. 아담한 연못도 있다. 이 연못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옛날 옛적에 김수로 왕비 허황후가 아들들을 보기 위해 칠불사를 찾았지만, 수도 중이라서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대신, 이 연못에 비친 아들들을 보고 뒤돌아갔다고 하는데 사실처럼 들린다.
허황후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작고 아담한 연못에는 백여 마리가 넘을듯한 잉어들이 사람 발소리가 나자 먹이를 주는 줄 알고 펄떡펄떡 물 위로 튀어 올랐다. 일대 장관이 따로 없다.
한국전쟁 폐사 후 1978년 중창…칠불암서 격상
지리산 반야봉 해발 약 800m 고지에 자리 잡았다. 삼국 시대 초기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 가락국 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수로왕 일곱 왕자가 이곳에 와서 수도한 후 모두 성불하였다고 해서 칠불암으로 불려왔다.
가야 불교의 중심 사찰인 칠불암은 1,100여 년 전 신라 효공왕 때 한 번 불을 때면 온기가 100일은 간다는 아자방(亞字房)을 지음으로써 더욱 유명해졌으나 한국 전란으로 칠불암 자체가 폐사된 것을, 1978년 훗날 쌍계사 강주와 주지를 지낸 대 강백 제월당 통광 대선사가 다시 중창했다. 폐사지에서 번듯하게 사찰의 규모가 커지면서 칠불암에서 칠불사로 절 이름도 격상됐다.
칠불사를 과거 초라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전각이 놀랄 만큼 규모가 크다. 경내 주차장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바로 머리 위에 보설루가 있다. 보설루에 들어서면서 걸린 현판에는 동국제일선원이라는 글씨가 힘차다. 보설루에서 법당에 올린 쌀 봉지를 사서 들어서니 맞은 편이 바로 대웅전이다. 대웅전을 보고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아자방,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삼성각, 공양간 등 전각들이 지리산의 너른 반야봉 자락을 따라 오밀조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 협시불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대웅전을 참배하고 나오면서 궁금한 것이 생겼다.
이 절을 중창 불사한 통광스님은 반야봉 너머 의신마을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전쟁 때 절이 불타버렸다. 스님은 폐사된 칠불사를 중창 불사하기로 서원을 세우고 불철주야 나무를 져다 나르는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일했다고 한다. 그 후 스님은 쌍계사 강원 강주와 주지를 차례로 역임하고 칠불사에 주석하시다가 입적했다.
방문 때마다 여러 사연으로 보지 못한 아쉬움
대한민국에서 아자방처럼 유명한 구들방은 없다. 왜냐하면, 한번 불을 때면 100일간 온기를 머금고 있다고 해서다. 아자방(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44호)을 처음 복원할 당시 경향신문(2016년 1월 11일 자)에 실린 기사 일부를 옮긴다.
한 번 불을 지피면 온돌과 벽면의 온기가 100일 동안 지속된다는 지리산 칠불사 아자방의 천년 비밀이 풀릴까?
경남 하동군은 칠불사 아자방지 구들 보수공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100일 온기의 비밀을 푸는 유력한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고 11일 밝혔다.
아자방지의 아궁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기존 아궁이 바닥 1m 하부에 수리 이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아궁이(도자기를 굽는 굴 가마) 형태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된 것이다.
칠불사의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 재위 연간(897∼912년)에 '구들 도사'라 불리던 담공 선사가 이중온돌 구조로 처음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방의 길이 약 8m에 방안 네 귀퉁이에 70㎝ 높이의 좌선대가 마련돼 그 구조가 아(亞)자와 닮았다 해서 '아자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칠불사는 1830년 화재가 발생해 아자방도 함께 소실됐는데 금담 선사와 대은 선사의 노력으로 5년 만에 중창됐으며 이때 아자방도 중건됐다. 이후 1948년 다시 소실됐다가 1983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두 차례의 참화에도 불구하고 아자방의 구들은 온전하게 유지돼 원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1976년 경남도 유형 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됐다. 아자방 온돌은 한 번 불을 때면 100일 동안이나 따뜻하다고 전해지며, 아자방지는 '세계 건축 대사전'에 수록될 정도로 전통불교의 선 문화와 주거의 온돌문화가 결합된 유적지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는 사전 예약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그냥 칠불사에 왔다는 이유만으로는 아자방의 형태를 볼 수 없어서 아쉬움이 컸다.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고 하니 어쩔 수가 없다.
사적기를 보면 아자방은 한국 다도(茶道)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선사가 1828년 아자방에서 정진하는 여가에 다신전을 초록하여 훗날 동다송의 기초를 정립했다고 한다. 근세에는 아자방에서 용성스님, 석우스님, 효봉스님, 금오스님, 서암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필자는 지난 5~6년간 한해 한두 번 정도는 꾸준히 왔는데도 예약해야 한다는 줄을 몰라서 여태껏 아자방을 보지 못했다. 어떤 때는 수리 중이어서, 어떤 때는 문화재 보호 차원이라서 등등 여러 사연으로 아자방을 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칠불사에 간 날 부산 범어사 불교대학에서 대형버스가 4대나 왔다. 갑자기 절이 꽉 차는 느낌이었다. 한꺼번에 몰리다시피 대웅전에 참배하는데 사람이 많아 부딪히면서 절을 하는데도 기분이 좋다.
구름 위의 찻집에서 한잔의 여유
이 찻집은 칠불사에서 유일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아자방과 대웅전, 문수전, 설선당, 보설루를 차례로 둘러보고 경내 주차장에 내려서면 "벌써 떠나는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때 눈에 들어온 마주 보는 전각이 '구름 위의 찻집'이다. '운상루'라고 하는데 이름도 반야봉만큼이나 멋지다. 전통차가 중심이지만 커피 맛도 수준급이다. 구름 위의 찻집에서 국화차를 주문했다. 그 진한 국화 향에 취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멍 때리는 시간도 괜찮은 찻집이다.
화개천을 따라 내려오다 보면 섬진강 참게탕 집이 있고 또 곳곳에 수제 찻집이 있다. 아무 곳에 들어가도 명품 차를 마실 수 있다. 구름 위의 찻집 운상루의 아쉬움을 달래려면 화개천 어느 찻집에라도 들어가서 따끈한 작설차 한잔을 마시면 운치가 더 있을 것 같다. 가을과의 작별은 이렇게 낭해야 한다. 정은영 울산불교문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