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새긴 돌, 상천리 국장생석표

[소소한 울산史 에세이]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2025-11-16     김잠출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1085년(고려 선종 2년) 한겨울. 왕의 명에 따라 호부가 공문을 내려 통도사의 경계를 확정 짓는 12개의 장중한 돌비를 세웠다. 울산 헌양현(언양) 남쪽 벌판에도 1기가 세워졌다. '국장생석표'라는 이름의 이 돌은 단순한 표지석이 아니라, 사찰과 국가의 관계를 증명하는 치밀한 권력의 선언이었다. 통도사로부터 동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 사방 4만 7,000 보의 사역지 중 하나였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남면 상천리 산37-15번지. 이 장생은 나라가 허락한 경계의 표시였다. 경내 사지를 정리한 후, 통도사에서 호부에 상소했고, 같은 해 5월에 국가가 첩지를 내려 비를 세울 것을 명령했다. 명에 따라 12월, 돌에 명문을 새겼다.

  글은 이두문을 썼고, 비록 윗부분이 마멸되고 단절돼 다 읽히진 않지만, 남은 글은 왕명에 의해 설치되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1.2미터 높이의 자연석이 긴 세월을 버티고 있다.

 장생(長生)은 '장승'이다. 신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수호신, 이정표, 경계표 등의 역할을 하고, 고려 풍수지리설과 함께 민속신앙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절이나 마을 입구 및 길가에 세워 마을의 수호신으로 벽사·비보(裨補)의 기능과 함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의 역할을 하거나 마을 사람들이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장생표주(長生標柱)·목방장생표(木榜長生標)·석적장생표·석비장생표(石碑長生標)·국장생석표·황장생·장승(長承)·장생우·장성(長性 또는 長城) 등이 같은 이름이다. 16세기 이후 장승이란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상천리 국장생석포. 김잠출 제공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는 나라의 명에 따라 세운 장생석표로 권위가 더 높다. '통도사 국장생석표'는 사찰의 토지 · 풍수 · 방액 등을 위해 세운 경계석으로 절에서 그곳까지의 일대가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것이고 당시 헌양현에도 통도사의 토지가 있었음을 알리는 증거이다. 고려시대 헌양현의 남쪽 일부 지역은 통도사에 속했다.

 상천리국장생석표의 남쪽 양산시 하북면 백록리에도 같은 국장생석표가 있다. 보물 제74호. 높이 166cm, 너비 60cm. 통도사의 경내를 표시한 것으로 동남방 약 2㎞ 지점의 도로변에 있다. 통도사 기록에 '사방산천의 기를 보충하기 위해 사방 열두 곳에 장생을 세웠다'고 돼 있다. 절의 경계를 표시하면서 땅의 기운을 보충해 절에 들어올 수도 있는 액을 막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고려시대 풍수나 도참사상의 영향으로 보면 된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으며 대형 사찰에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사원전(寺院田)'이라는 토지는 사찰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사찰은 토지를 농민에게 경작하게 하고 수확의 일정 부분을 조(租)로 거두었고, 일부는 직영 농장으로 운영했다. 또 사찰은 자체 시장을 열거나 수공업 공방을 운영하여 현물과 화폐를 획득했다. 사찰은 종교기관이면서 경제기관이었다. 승려들은 사찰의 경제를 운영하는 관리자로 사찰 소유의 농장 운영과 불경 인쇄 및 판매, 염직과 제분, 도자기 제작 등 생산 활동에도 참여해 사찰 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했다. 고려는 해상 무역이 발달했는데, 일부 사찰은 이를 활용해 국제 무역에 참여하고 노비를 소유하기도 했다.

통도사 국장생석포. 김잠출 제공

 

시간이 흐르면서 경제적 집중과 비대화, 종교의 타락이 심화되고 자연스럽게 개혁과 탄압의 압박이 가해졌다. 조선은 유교적 개혁정책을 채택하고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거나 약화를 시도하게 된다.

 상천리국장생석표는 무인석처럼 무덤을 지키는 비도 아니요, 공덕을 드러내는 찬미의 문도 아니다. 왕실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땅을 분할하는 선포이며, 불교의 사세가 나라 울타리 안에서 확장되던 시기의 흔적이다.

 "경계란 무엇인가." 단지 땅의 테두리만 뜻하는 게 아니다. 통도사 국장생석표는 그 선을 돌로 박아 넣은 것이다. 절이 소유한 땅의 너비가 이만큼이라고 자랑하고 과시하는 선포였다. 흔히 문자와 기록으로 역사를 읽는다지만 돌이나 그림이 역사를 전하기도 있다. 토기 파편을 보고 새로운 해석을 하고 비석 하나가 기존의 역사를 뒤집은 사례도 있다. 국장생석표는 고려라는 나라와 통도사의 힘을 보여주면서 그런 사연을 돌에 새겨 남긴 단단한 서사이자 선포문으로 봐도 무방하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