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은행이 고액권 화폐 인물의 최종 후보 중 한 명으로 신사임당을 선정할 움직임을 보이면서 여성계가 들썩거리는 모양이다. 일부 여성계 인사들이 유교적 가부장제에서 '현모양처'를 상징하는 신사임당은 변화된 시대의 여성상에 부합되지 않는 인물이라며 반대운동에 나서겠다고 한다. 사실 '현모양처'는 신사임당이 살았던 조선시대에 사용된 용어가 아니다. 잘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현모양처주의는 서구에서 19세기에 태동했다. 이 흐름이 일본에서 명치 후반기에 내셔널리즘이 고양되면서 동양적 '현모양처론'으로 확립됐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유교적 여성관을 만나 1970년대 군사정권이 국가 이데올로기의 일환으로 한국의 여인상을 '리모델링'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지위는 고대사회부터 조선 초기까지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고구려 때부터 관습화 된 데릴사위제나 고려시대 권문세가 여인네들의 '치맛바람'은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기에 충분한 자료들이다. 세 명의 여왕을 배출한 신라시대 역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상당했다. 그 중 한 사람인 선덕여왕은 자신의 사촌 동생인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는 당시에 혈연관계나 능력으로 보아 왕위를 계승할 위치에 놓인 사람이라면 그가 여자라는 사실도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남자가 없는 가구에서는 여자가 정녀(丁女)즉 60세 이하의 노동 가능한 연령의 가장으로서 납세의 의무를 이행했다.


 고려시대의 경우 여성의 '입김'은 어느 시대보다 강했다. 고려는 다섯 차례에 걸친 몽고의 침략으로 여성들이 고난의 삶을 산 시기였지만 주체적이고 개성적인 삶을 영위하려는 의식이 강했다. 고려 충렬왕 때 대부경 벼슬에 있던 박유가 원에 공녀로 끌려가는 고려여인들을 구제하고자 축첩을 허용할 것을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다.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올린 상소였지만 충렬왕은 끝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바로 지금으로 치면 '고려 여성단체'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축첩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회 분위기는 양성평등으로 이어져 유산분배나 가정대소사에 남녀 차별이 없었다. 아들이 없을 경우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이 제사를 받들었고, 사위가 처가의 호적에 입적하여 처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신사임당이 살던 조선 연산군시대는 이같은 전통적인 여성지위가 성리학을 근간으로 한 조선의 유교이념이 충돌했던 시기였다. 신사임당은 바로 그 과도기의 중심에서 조선 남성사회가 짖누르는 가부장적 권위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한 인물이었다. 19세에 이원수와 혼인, 38세까지 강릉 친정에 살면서 율곡선생을 비롯한 4남3녀를 길러낸 그녀는 뿌리깊은 양반가의 자손인 남편을 20여년간 처가살이를 하도록 했다. 그녀는 또 율곡을 비롯한 자녀들을 주체적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기주도형 교육관을 심어주었다. 말년에 그녀는 남편에게 "내가 죽거든 개가하지 말라"고 요구한뒤 이를 따지는 남편에게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한 일화에서도 주체적 여성관의 일면이 잘 드러난다. 신사임당이 가부장적 '현모양처'이기에 지폐의 인물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신사임당의 정체성을 간과한채 왜곡된 역사가 만든 주변적 담론에 치중한 결과다. 여성이 여성을 제대로 학습하지 않은채 잘못된 정보로 반대에만 열을 올린다면 자신의 정체성조차 흔드는 '전제의 오류'를 범하는 꼴이 되고 만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