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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산공단 야경.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와 함께 우리 나라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비철금속 제련기지인 '온산국가산업단지'는 울산공단에 산업체가 잇따라 들어서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기간(1972-1976년)에 조성계획이 만들어졌다.

 정부는 1962년부터 66년까지의 1차, 그리고 67년부터 71년까지의 2차 5개년 계획을 대체적으로 성공시키자, 3차 기간에는 고도성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에 총력을 쏟기로 했다.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안정적인 균형성장을 기조로 중화학공업을 중점 육성키로 하고, 4개 국제단위 비철금속 제련소를 건설하기로 했다.

 정부는 1973년 4월 13일 비철금속 제련사업 육성계획을 확정·발표했다. 4월 27일에는 중화학공업추진위원회가 울산군 온산면 일대에 국제규모의 대단위 비철금속 제련소를 건설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74년부터 80년까지 구리와 연, 아연, 알루미늄 제련소를 단계적으로 건설하고, 제품가공 계열공장과 특수금속 제련소의 건설도 포함됐다. 그로써 울산은 우리 나라 비철금속산업의 핵심기지로 떠올랐다. 울산이 비철금속산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9년에 지금의 남구 여천동에 대한알루미늄의 연산 1만5,500톤의 알루미늄 전해공장이 준공됨으로서 비롯된 것.

 온산공단은 서남북 3면이 산으로 둘러싸였고, 동쪽이 바다에 접해 있어 임해공업단지로서의 조건을 갖춘 것이 최대의 장점으로 꼽혔다. 또 바람이 육지에서 바다로 주로 불어 공해대책에도 유리한 입지로 판단돼 비철금속 제련기지로 확정됐다. 정부는 연내에 준비작업을 모두 마무리짓고, 1974년 중에 착공키로 했다.

 온산공단에 공장을 최초로 짓기로 한 업체는 온산동제련이었으나, 준비작업이 늦어져 고려아연이 맨 먼저 착공했다. 영풍과 영풍광업이 대주주인 고려아연은 1976년 7월에 연산 5만톤의 아연제련소 건설공사에 들어갔다. 이태 뒤 78년 11월에 준공하고 아연생산을 시작했다. 부산물로는 10만톤의 황산과 300톤의 카드뮴괴(塊)를 생산했다. 온산공단 첫 가동공장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우리 나라 최초의 대단위 아연제련소로, 국내 아연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다.

 온산동제련은 74년 5월에 만들어진 한국동제련지주(주)로부터 비롯됐다. 75년 8월에 온산동제련(주)으로 회사 명칭을 바꾸고, 고려아연보다 4개월이 늦은 76년 11월에 연산 8만톤의 전기동 생산공장을 착공했다. 4년여의 공사 끝에 79년 12월 11일에 준공식을 가진 뒤, 시운전을 거쳐 80년 4월에 생산을 시작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등 나라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혼란에 빠져 진통을 겪었다. 준공식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고(故) 최규하 전 대통령이 직접 참석했다.

 1978년 3월에는 풍산금속이 연산 10만톤의 종합 신동(伸銅)공장 건설공사에 들어가, 2년4개월여만인 80년 7월에 준공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효성금속 역시 80년에 알루미늄 압연공장을 준공하고 가동에 들어갔다. 고려아연과 포항제철이 캐나다 INCO사(社)와 합작해서 1987년에 설립한 코리아니켈은 89년 공장을 준공하고 가동을 시작했다.

 1976년에 쌍용양회와 이란 국영석유회사가 합작해서 온산공단 40만평의 부지에 건설한 쌍용정유는 80년 5월 정유공장을 준공하고 생산을 시작했다. 다음해 81년 1월에는 윤활유공장을 가동했다. 그 외에도 석유화학과 펄프, 선박·기계 업종 등의 업체도 차례로 들어서 온산공단은 대단위 임해중화학공업단지로서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온산공단은 1976년 3월 10일과 12월 31일 두 차례에 걸쳐 건설부 고시 제28호로 산업기지개발촉진지역이 추가 지정됐다. 전체 면적은 울주군 온산읍과 청량면, 온양읍, 서생면 일대 1,730여만㎡에 이른다. 공장부지 1,500여만㎡와 공공용지 136만여㎡, 지원시설용지 54만여㎡, 녹지 지역 38만여㎡ 등으로 짜여졌다. 울산미포국가공단과는 공업지구간, 업종간 공업벨트가 형성돼 울산이 중화학공업기지로서의 기반이 구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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