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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모임에서 울산 교육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단연 화제의 중심은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에 쏠렸다. 맞다. 사건이다. 언감생심 학생이 교사에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또 하나는 교사가 어린 제자들 앞에서 옷을 벗어버린 사건이다. 뜨악할 일이지만 이미 벌어졌다. 어쩌면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거나 욕을 하는 일보다 교사가 옷을 벗어던진 일이 더 엽기적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개를 물어뜯는 격이니 졸던 눈빛이 반짝할 일 아닌가.
 울산에서 벌어진 학교판 엽기사건은 인터넷과 트위터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휴대전화 때문에 벌어진 고등학생의 교사 폭행은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지만 교사 알몸사건은 달랐다. 파급력이 대단한 건 특이하기 때문이다. 왜 벗었을까. 그것도 여교사가 아무리 초등학생들이지만 제자들의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꼬리를 문 의문이 신상털기로까지 확대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이지 싶다.

 문제는 이 사건에 대한 우리 교육계의 진단이다. 다시 모임으로 돌아가자. 그 모임에서 교육계에 오랜기간 몸담은 한 인사는 "제자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는 여교사를 교단에 방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교사의 직업윤리와 정신상태까지 거론하는 그의 말에는 이미 분노가 넘쳐 있었다. 그 자리에 그 교사가 있다면 따귀라도 올릴 기세였다. 아뿔싸, 이 장면에서 그 교사를 변호했다가는 저자에게 멱살 잡히는 일은 불을 보듯 뻔하니 목젖까지 올라오는 표현의 자유는 기가 죽었다.
 왜 그 교사는 옷을 벗었을까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회다. 옷을 벗은 행위, 그 결과를 두고 평가에만 매달릴 뿐, 왜에는 관심이 없다. 자, 눈을 감아라. 그리고 천천히 우리가 만난 봄날의 기억을 떠올려라. 새로운 친구들과 눈으로 인사하고 환하게 웃던 기억을 떠올리고 소풍날 울산대공원 숲길을 달리며 까르르 새잎들과 교감했던 순간들을 떠올려 보자. 그리고 그 기억의 한쪽 끝에 잠깐 실수로 내 것이 아닌 것을 손에 쥐었던 얼굴 붉히는 순간이 떠오르면 그냥 조용히 손바닥 한편 펴 주겠니. 학창시절, 이런류의 기억 하나쯤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분실사건이 나면 담임은 아이들에게 감정적 호소를 하게 된다. 그 감정적 호소가 통하지 않을 때 담임은 각자의 방식대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기 마련이다.

 이성보다 감성지수가 꽤나 높은 교사는 순간 스스로 북받치는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차올라 어떤 행위에 대한 판단조차 이성의 영역에서 이탈했을지도 모른다. 바로 그 표현이 '알몸시위'로 나타났다면 천만 다행이다. 비록 비난의 대상이 되고 징계를 당하는 수순을 밟더라도 그런 교사라면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 돌보듯 열정으로 가르칠 것이기에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기도 한다.
 물론 알몸시위에 대한 변호는 위험하다. 현시적이고 결과주의가 유일한 잣대인 우리 교육계에서 감히 알몸시위를 변호하는 것은 돌팔매를 당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돌을 맞아야 한다면 나는 맞을 생각이다. 그리고 돌을 던지는 자를 향해 말하고 싶다. 행위의 이면에 가득 차 있는 열정부터 만나보고 돌을 잡는게 순서가 아니겠냐고. 우리가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결과주의는 지금 치명상을 입고 인공호흡기로 헉헉거리는 판에 열정에 돌을 던지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말이다.

 교육이 파탄지경이다. 학부모들은 울산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며 인터넷을 뒤지고 명품강의를 찾아 정보를 모은다. 교육당국도 눈빛이 다르다. 학력향상이 최고이자 최선의 목표가 됐다. 학생들은 성적순으로 줄을 서고 열외가 되면 열등인간 취급을 당한다. 특별한 이름을 붙인 공부방에 들어가기 위해 한치의 빈틈 없이 '열공모드'에 학교와 학생과 학부모가 하나로 달려가고 있다. 최선의 가치가 학력에 있으니 멱살을 잡든 주먹을 올리든 욕설을 뱉든 그 모든 행위는 악이다.
 반대로 교사 역시 가능한 더욱 엄격하게 학력신장에 매진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주문이다. 학생이 교사에게 폭언과 욕설을 하든 수업을 방해하든 '무관용원칙'으로 다스려주는 교육당국이 버티고 있기에 학력신장에만 매진하면 된다. 다만 한가지, 학생을 이해하고 학생의 가슴을 열어 소통하려는 행위는 미안하지만 부적절하다. 그래서 머리는 차갑게 얼굴은 더욱 굳은 표정으로 교권을 확립하도록 요구한다. 그 결과주의가 만든 그늘아래 부채를 부치는게 우리 교육당국의 성과다. 아이들은 사방팔방으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데 필요없는 그늘을 만드는 곁가지는 가위질로 잘라야 직성이 풀리는게 우리 교육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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