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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폭의 수채화 속으로 걷는 가을 산행 백미
[울산의길] 죽전마을~사자봉~배내고개
2011년 10월 11일 (화) 22:01:22 강정원 mikang@ulsanpress.net
   
▲ 영남알프스 하늘억새길 3구간의 백미인 재약산 일대 사자평원은 지금 은색 억새가 절정을 이루고 있다. 사진 재약산의 주봉인 사자봉 정상부에서 수미봉 서쪽 능선쪽으로 바라본 풍경으로 억새와 험준한 공룡능선이 조화를 이뤄 한폭의 그림을 만들고 있다.

'하늘억새길' 이번 답사는 3, 4구간이다. 2구간(영취산~죽전마을)이 끝나는 상북면 이천리 죽전마을에서 사자평, 재약산 사자봉 수미봉, 능동산을 거쳐 배내재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중 3구간은 죽전마을에서 사자봉까지 8.4㎞, 4구간은 사자봉에서 능동산 배내재까지 6.5㎞이다. 3구간 답사후 원점회귀하는 시간과 4구간을 함께 답사하는 시간이 엇비슷해 한꺼번에 답사하기로 했다.

 

# 죽전마을~배내길까지 13.8㎞ 여정
아직 '하늘억새길'을 알리는 게시판이 세워지지 않아 죽전마을에서 재약산 사자평으로 올라가는 등산로를 찾기란 쉽지 않다. 시작점은 2구간이 끝나는 죽전마을 배네치아산장에서 1㎞ 남짓 국도를 따라 울산방향으로 올라와야 한다. 배내자연농원 옆에 작은 공중화장실이 있고 그 곁에 산행 목표지별 거리를 적어 놓은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등산로 초입은 전원주택 등을 짓기 위해 형질을 변경한 가파른 시멘트 도로에서 시작된다. 재약산의 서쪽 사면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사자평원이 시작되는 7부 능선까지 2.4㎞ 가량의 산행길은 내내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등짝을 때리는 가을 햇살과 등산로의 푸석한 먼지를 감당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초입에서 길을 물었을 때 "조금, 힘들낍니더"하던 이 지역 주민의 걱정이 헛말이 아니었다. 가파른 길은 6부 능선 가량을 오르고서야 비로소 얌전해 진다. 시간을 보니 30분도 되지 않았다. 비 오듯 하는 땀을 식히기 위해 펑퍼짐한 바위에 앉으니 맞은편으로 배내재,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까지 하늘억새길 동쪽 구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한낮의 햇살을 받은 신불재와 영취산 단조늪의 억새가 회색빛을 내고 있다.
 숨을 고르고 다시 가파른 길을 걷기를 10여분. 산들늪을 알리는 표지판을 만난다.  표지판은 산들늪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곁들였다. 재약산을 둘러싼 사자평 동남쪽의 산들늪은 고산지대에 있는 늪 가운데 손꼽히는 경관을 지니고 있다. 해발 700m에 위치해 구름이 늘 머물며 물기를 뿌리고, 늪 주변이 광활한 평원이다.

 

   
▲ 재약산 수미봉과 사자봉 사이 억새평원에서 바라 본 사자봉.

 

# 가파른 고개 넓은 평원이 교대로
산들늪은 지난 2006년 고산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면적은 0.58㎢이고 이탄층이 발달된 습지에 진퍼리새와 오리나무 군락이 무성하다. 멸종위기 종 2급인 삵과 복주머니난, 큰방울새난 등 보호가치가 높은 야생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이곳은 고산습지인데도 산간계류에 사는 버들치가 집단으로 서식하고 있다. 버들치는 깨끗한 1급수의 물에서만 사는 지표종이다. 수량이 넉넉하고 경쟁자가 없어서인지 버들치의 개체수가 많다.
 양서류로는 계곡산개구리·산개구리·무당개구리·도롱뇽 등이 서식한다. 특히 계곡산개구리는 집단으로 서식하여 늪의 중요성을 한층 더하고 있다. 파충류로는 멸종위기 보호야생동물인 까치살모사를 비롯, 대륙유혈목이·장지뱀·줄장지뱀·쇠살모사 등이 발견됐다.
 조류는 천연기념물 제323호인 황조롱이와 제327호인 원앙을 비롯하여 물까마귀·쏙독새·어치·멧비둘기·꿩·까마귀 등이 발견됐다. 베치레잠자리 등 200여 종류의 곤충류도 서식하고 있다.
 표지판에서 서남쪽 방향은 향로산이고, 북동쪽으로 난 길을 잡으면 재약산이다. 재약산 쪽 길을 잡은 후 키 작은 나무터널 길을 벗어나면 사자평의 너른 품이다. 어깨 위로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스치며 푹신한 능선을 걷는 기분이 그만이다. 억새 잎사귀끼리 서로 비벼대며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한때 '백만 평 억새'로 불리던 재약산 사자평의 억새는 광활했던 옛 모습이 아니다. 고원습지로 복원되고, 목축을 하던 화전민들이 사라지면서 평원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억새군락도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평원을 뒤덮은 억새군락을 볼 수 없었지만, 건강하게 복원되는 습지는 또 다른 의미의 볼거리가 될 것이기에 실망할 일은 아니었다. 
 사자평 동쪽을 난 길을 계속가면 재약산의 봉우리인 수미봉과 사자봉과 연결된다. 너른 분지를 휘돌아 가는 길은 온통 가을이다. 쑥부쟁이, 개망초꽃이 반기고, 여기저기 익은 단풍들이 눈에 들어온다. 산을 타는 게 아니라 가을을 탄다.

 

 

   
▲ 사자봉에서 능동산쪽으로 가는 능선길에서 바라본 얼음골마을인 밀양 산내면.

 

# 황금빛 억새에 울긋불긋 단풍까지
재약산은 재약산(수미봉), 천황산(사자봉)으로 혼동되어 부르고 있다. 대부분의 등산지도에는 재약산과 천황산 따로 표기 되어 있다. 당초 재약산은 주봉이 수미봉(1,018m)이고 천황산은 주봉이 사자봉(1,189m) 이었다. 천황산이 일제 때 붙여진 이름이라 하여 우리 이름 되찾기 일환으로 천황산 사자봉이 재약산 주봉으로 승격(?)됐다.
 재약산 억새는 고사리 분교에서 수미봉에 이르는 수미봉 주위와, 사자봉 주위의 억새 평원이 볼만하다. 이중 압권은 사자봉 주위의 억새평원이다. 억새평원은 지금 하얀 진객들의 군무가 황홀하게 펼쳐져 있다. 은색물결이 일렁일 때마다 햇살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가을하늘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연병장이었다고 한다. 이 평원에서 승군들이 연병(練兵)에 지친 고단한 몸을 누이고, 억새를 위안 삼아 행군에 지친 심신을 달랬을 것이다.
 재약산에는 자연치유 이미지가 있다. 재약(載藥) 즉, '약을 지녔다'는 이름만으로도 그런 느낌을 준다. 신라 흥덕왕의 셋째 왕자가 이곳에서 병을 고쳤다고 하고,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이 스승 유의태를 집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철거되지 않은 주점을 지나 너럭바위를 거쳐 사자봉 정상에 서면 이웃한 가지산, 그리고 신불산과 영취산으로 이어지는 해발 1000m 이상 산봉들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표충사가 있는 서북쪽의 가파른 공룡능선이 압권이다. 그 너머로 밀양시가지까지 크고 작은 산들이 켜켜이 서 있다.
 사자봉에서 내려 보면 수미봉과 맞닿아 있는 천황재 평원이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다. 가르마 같은 억새길을 따라 등산객들의 유쾌한 발걸음이 가볍다. 하산하는 이들의 웃음소리가, 유쾌한 수다들이 억새 속으로 맑게 울려 퍼진다.
 사자봉 정상에는 아직 천황산(天皇山)이란 표지석이 그대로 있다.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며 사자봉이란 이름을 얻었는데도 일본 역대군주에 대한 칭호가 들어간 표지석은 그대로다. 표지석 옆 산사람들이 모아 올린 돌탑이 더 정겹다.
 사자봉에서 하늘억새길 3구간은 끝나고 이후부터는 4구간이다. 사자봉에서 북쪽으로 난 길은 천황재에서 사자봉으로 오르는 아슬아슬한 바윗길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경사도가 낮은 평지에 가까운 길이다. 억새길은 10여분만에 끝이 나고, 이후로는 얼음골 골짜기를 조망할 수 있는 능선길을 타야한다. 능선길은 벌써 가을의 끝이다. 키 작은 나무들 중 상당수가 이미 나뭇잎을 떨어뜨렸다. 드문드문 북쪽 사면을 조망할 수 있는 쉼터(?)에서 보면 밀양 얼음골 쪽 풍경이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들녘엔 벼들이 황금 카펫처럼 펼쳐져 있고, 최근 개통된 울산~밀양간 국도가 시원하게 뚫려있다. 가지산에서 굽이굽이 내려오는 옛 국도는 이제 추억의 공간이 된 듯, 오가는 차량을 보기 쉽지 않다.

 

   
▲ 사자봉 정상의 일본 왕의 칭호와 같은 천황산 표지석.

# 일제 잔재 그대로인 천황산 표지석
이 키 작은 나무 숲길이 끝나는 지점에 벌써 16년을 이어왔다는 주점이 있다. 막걸리 한잔을 시킨 후, 초로의 길로 접어든 주인과 추억을 나눈다. 주인이 기억할리 없는 '나만의 추억'을 이야기 했는데도, 그는 마치 그것을 기억하기라도 하듯 구수한 입담으로 받는다. 일흔이 가까웠다는 그는 "16년전 그때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혹 삶에 지쳐 산을 찾는 이들에게 용기가 될 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주점에서 다시 시작되는 길은 솔직히 고행에 가까웠다. 벌써 한나절 이상이 되어버린 산행에다 별 볼 것도, 느낄 것도 없는 임도의 연속이다. 그 끝에 능동산(983m)이 있다. 능동산은 서(西)알프스의 관문이며 7개 산군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배내고개에서는 가파른 경사에 혼쭐이 나기 일쑤지만 거꾸로 오르는 길은 비교적 완만하다. 능동산을 스쳐 4구간의 끝인 배내고개로 내려오니 해는 이미 기울어 사위가 어둑하다. 제법 붉은 저녁노을이 오늘 지나온 산 봉우리들을 또렷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고 있었다. 억새가 지천인 하늘억새길은 조만간 붉은 단풍을 더해 산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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