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슴도치 한 쌍을 집에서 키우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친구에게서 고슴도치 수컷 한 마리를 분양받아와 어쩌지 못하고 키우게 되었고, 상자 속에 하루 종일 가두어두니 먹이 먹는 약간의 시간을 빼고는 움직임도 없고 소리 하나 없었다. 자연 속에 두면 제 맘대로 돌아다닐 녀석인데 인간에 의해 어쩌다 잡혀와 한번 제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이야기 나눌 대상도 없으니 저러다 우울증에 걸리지 싶어 결국 거금 12만원을 주고 암컷 한 마리를 사서 합방을 시켜주었다.
 그런데 몇 달 동안 그렇게 요동도 하지 않던 수컷이 얼마나 좋았던지 시종일관 소리를 내면서 암컷을 따라 다니며 생기가 펄펄 났다. '아, 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암컷이 제 몸의 가시가 다 뽑혀 나가도록 온 몸을 긁고 있어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중이염라는 것이다.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1회 치료비가 6~7만원인데 금방 몇 십만원의 치료비가 날아가버려 집안의 분란이 되었다. 아이보다 배꼽이 큰 치료비를 계속 감당할 것인가? 그만 제 운명에 맡기고 살든 죽든 내버려 둘 것인가?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손에 제 목숨을 맡기고 있는 그 녀석의 초롱한 눈망울을 보면서 어찌 그냥 버려두겠는가? '미안하다. 네가 우째 인간들에게 잡혀 왔노? 건강할 땐 인형처럼 만지작거리며 데리고 놀다가 아프다고, 돈이 많이 든다고 너를 버리려 하다니….' 미안하고 불쌍한 마음에 결국 녀석의 치료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는 야생에서 녀석들을 데려와 이런 죄 짓지 말아야겠다고 맹세하면서….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멀쩡한 소가 굶어서 쓰러져가는 동영상을 보면서 나는 충격에 빠졌다. 사료값에 비해 소값이 너무 싸 수지 타산이 맞지 않다 보니 소를 키워 생계를 유지하는 축산농가가 하소연이 담긴 항의 표시로 그대로 어린 소를 굶겨죽이는 것이었다. 오죽 분통이 터지면 그랬을까마는 그래도 이건 너무 잔인하다 싶었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고,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논리에 의해 사람과 함께 뒹굴던 소나 개도 인간의 삶에 그 소용가치가 없으면 그들의 목숨 따위는 하잘 것 없다는 것이다. 구제역 때문에 아무 죄 없는 소들과 돼지들이 생매장되어 얼마나 죽어갔는가? 그 피가 아직도 지표를 덮고 있는데 이젠 사료값 때문에 돈이 뭔지도 모르는 소들이 제 명에 죽지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굶어죽어 가고 있다니….
 사람으로 태어날 때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풀은 풀대로, 소는 소대로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농업이 주 산업이었던 시절에는 소가 사람의 노동력을 대신하여 죽을 때까지 논밭에서 일을 하고, 죽어서도 몸뚱아리 전부를 인간을 위해 바친다. 고기덩어리뿐만 아니라 창자나 내장조차도 전골 재료로 먹도록 하고, 피는 선지국으로 끓여 먹고, 두개골과 뼈다귀는 곰국으로 우려내어 먹고, 마지막 가죽 조차도 구두나 핸드백, 가죽 옷으로 사용케하면서 아낌없이 인간을 위해 내어놓는다.

 지금이야 노동력 도움을 받기 위해 키우는 것은 아니고 오로지 사람의 양식으로만 활용하기 위해 육우를 키우고 있다. 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 그게 소의 운명이라면 최소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아 있을 동안에는 먹고 자고 생식을 하는 원초적인 기본 욕구를 해결해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그리고 동물을 죽일 때에는 적어도 목적에 맞거나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소도 그래야 자신의 역할을 다 하는 게 아닌가? 인간의 경제 논리에 따라 이렇게 고통스럽게 굶겨 죽일 수는 없다.
 동물의 목숨을 함부로 여기는 이기심이 곧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폭언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무서운 사회를 만들어가지 않을까? 영화 '워낭소리'가 생각난다. 인간과 동물 간의 교감을 일깨우며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 명작이었다. 이런 영화를 보면서 감동하는 것은 결국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측은지심(惻隱之心)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는 이런 선정(善情)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생명에 대해 귀히 여기는 마음이 곧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간다고 본다. 더 이상 인간의 욕심으로 동물을 함부로 죽이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 내가 소로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