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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아름다운 서재 13. 허영란 울산대 교수
사람의 삶과 밀착된 역사학 연구 기본에 충실한 공간
2012년 11월 15일 (목) 17:36:29 김주영 uskjy@ulsanpress.net
   
▲ 허영란 교수에게 그의 서재는 생활의 공간이다. 두터운 논문과 씨름하며 치열하게 지식을 흡수하는 곳이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수업준비를 하는 일상의 공간이다. 그리고 가끔씩은 즐거운 재미와 삶의 시야를 넓혀주는 든든한 친구같은 곳이다.

교수나 학자 등 지식인들에게 서재는 사실 '생활'의 공간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여러 책을 보거나 두터운 논문과 씨름하며 타인의 지식을 각고의 노력을 통해 흡수한 뒤 달디단 창작의 열매를 맺는 일상을 이어간다. 7일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을 때, 허 교수 역시 "우리같은 사람에게 서재는 '생업수단'이자 당연한 공간인데 크게 소개할 것이 있겠냐"고 다소 무미건조하게 자신의 서재를 정의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간 인생에, 혹은 그동안 해온 학문의 방향에 영향을 준 책들을 소개해 달라는 얘기에 책을 찾기 시작하더니 금세 "아 이렇게 오랜만에 좋은 책들을 꺼내보니까 기분이 좋아진다"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때부터 책벌레로 불릴만큼 책 많이 읽어
수학계열 재능 놔두고 서울대 국사학과 전공
2008년 울산대 교수 부임하면서 울산과 인연
5일장·장생포 이야기 등 발로뛰는 연구 정평
모비딕같은 포경사 정리 책 집필해보고 싶어

#연구와 여가 위한 두공간으로 나눠
허영란 교수의 서재는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뉜다. 한 곳은 자신이 말한 것처럼 '생업수단'인 서재로 현재는 그의 교수 연구실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은 주로 연구에 필요한 논문이나 관련분야 서적이 대부분이다. 그는 "집필이나 강의 준비를 할 때 사용하는 참고 자료를 모아 이곳에 꽂아 놓는다"며 "주제별로 정리돼 있는데 한쪽은 그간 연구했던 일제시기 근현대 모습과 관련돼 있고 한쪽은 독도연구, 또 한 쪽은 울산의 지역사 연구와 관련 있는 것들이다"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집에 있는 여가를 위한 서재로 주로 시야를 넓히기 위한 책들이 많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는 철학이나 인문서, 소설 등 지적인 재미를 주는 책들을 틈틈히 보는데, 요즘 많이 나오는 자기계발서류는 잘 안 읽는다. 주변에서 늘 듣는 얘기들인데 굳이 책으로 읽을 필요는 없지 않냐"며 웃었다.
 
#어릴적 동네 책은 다 읽었던 소녀
어릴적에도 책을 많이 봤었겠다는 얘기에 그는 어릴적부터 책벌레에다 모범생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엔 부유하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았던 터라 보통 2층 양옥집이 나란히 있었던 곳에 살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이웃간이 서로 열려 있다보니 서로 친구집을 오가며 책을 읽기가 다반사였다"고 했다. 다른 친구들이 노는 사이에도 책을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보니 초중고를 졸업할 때쯤에는 스무집가량 되는 이웃집에 있는 책들을 거의 섭렵하게 됐다고 했다.

이 당시 기억에 남는 일화로 그는 어릴 적 어머니가 밤에 책을 읽으면 전기요금이 많이 나온다고 책을 못 읽게 해 이불을 덮어쓰고 스탠드 불에 의지해 책을 읽었을 때를 꼽았다. 허 교수는 "초등학교 3, 4학년 때인가 한 날은 <집없는 천사>라는 동화를 읽는데 내용이 너무 슬퍼서 눈물이 흐르는데 소리도 못내고 줄줄 눈물만 흘리며 끝까지 책을 읽은 게 아직도 기억에 난다"며 웃음을 보였다.

이처럼 책벌레였던 시절을 거쳐 현재는 역사학자로서 인문학에 파묻혀 사는 그이다보니 으레 문학소녀였겠다는 질문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러나 그는 의외로 중고등생 시절엔 수학계열의 과목을 잘하고 좋아해 이과를 지망한 학생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그는 이과를 가면 무조건 의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해 피를 봐야하는 의대는 피하자고 마음먹고 결국 진로를 수정하게 됐다고. 이처럼 감수성이 예민했던 풋풋한 대학생은 이후 서울대 국사학과에 진학해 그곳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뒤 현재는 울산에서 보통사람의 구체적인 삶과 밀착된 역사학을 연구하고 또 가르치고 있다.
 
#울산에 대한 다양한 역사문화 연구 추진
서울 출신인 허영란 교수가 울산에 온 것은 2008년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부교수로 부임하게 되면서 부터다. 근현대사 중에서도 일제시대가 전공인 그는 박사학위를 일제시기의 5일장을 주제로 받으며 이후 아래로부터의 역사, 연표에 나오지 않는 역사를 주로 공부해 왔다. 특히 울산에 오기전에도 안성 등 지방의 역사를 연구한 그는 울산에 온 뒤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펄떡이는 에너지로 다양한 지역의 역사·문화 연구를 펼치고 있다.

지금처럼 역사를 사람에게서 풀어나가게 된 계기가 있냐는 질문에 그는 "대학시절 갓 입학한 스무살 때만 해도 구조주의라는 것으로 사회가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현실을 들여다보니 한 사회의 틀을 만들고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구조지만 결국 그것의 불합리함에 맞서 그를 바꾸려는 사람들에 의해 사회는 끊임없이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구조를 공부하되 변화를 통해 세상을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사회적 평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바꿔나가는 '사람'에 관심이 갔다는 그는 이후 구조에 역행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연구하게 된다. 그의 박사논문 주제이기도 한 일제강점기시절 5일장 연구는 급격한 사회 변동을 겪으면서 당시 축소될 것이라고 예상된 5일장이 오히려 지속·확장된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는 이 연구를 위해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 '5일장의 변동과 지역주민의 대응'에 관한 기록을 일일이 검토·정리했다.

그는 발로 뛰는 연구자로도 유명하다. 가령 울산의 장생포 고래 포경사를 연구 할 때 그는 직접 지역 향토사가들과 함께 일일이 지역에 얼마남지 않은 포경사를 증언해줄 이들을 만나 구술녹취를 했다. 이 연구는 <장생포 이야기>라는 책으로 출간됐는데 육성넘치는 사투리가 얼마나 때깔나게 재현됐는지 울산 토박이들이 봐도 참 재미있는 책으로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처럼 자신의 역할이 중앙의 지식과 담론을 지역에 전하면서도 또 지역적 특성이 담긴 것들을 외부에 알리는 중간 매개자의 역할에 있다고  본다는 그는 앞으로도 부지런히 이 역할을 해나가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김수영 산문집·모비딕이 인생에 큰 영향 끼쳐
소설류도 읽으시냐는 질문에 그는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제자들에게 추천하기 위해 읽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특히 알랭드 보통의 소설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불안> 등을 재밌게 봤다고 말했다. 또 제자 세대를 이해하자  <88만원 세대>와 같은 책부터 역사학의 기본서가 새롭게 나올 때면 모두 한번씩 훑어서 보게 된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의 책임과 부담감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 날 인생에 영향을 준 책을 소개해 달라는 말에 그가 고르고 골라 뽑아든 책들은 김수영의 산문전집과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 허먼 멜빌의 <모비딕>,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등이었다. 특히 김수영의 산문전집은 빛바랜 표지와 내지가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이 책에서 일제 강점기 시절 지식인이었던 김수영의 사례와 고백을 통해 식민지 지배가 한 국민의 논리적 사고까지도 어떻게 지배하게 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김수영은 이 책에서 요즘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생각은 한국어로 하고 표현은 다시 영어로 바꾸듯 자신이 논리적 사고는 일본어로 하고 그를 다시 한국어로 글 속에 내뱉는 과정을 반복했다고 고백한다. 이 책에는 또 허 교수가 대학생 시절 껌 포장지를 접어 책갈피를 곱게 만들었던 표식이 꽂혀 있었는데 당시는 이게 유행이었다고 했다. 이를 보니 지금보다 더 열정적이고 풋풋했을 그의 과거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또 모비딕의 경우 최근 연구한 울산 장생포 포경사와 관련해서도 큰 도움을 줬는데 읽는 내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다. 이 책을 '미국 포경사와 문화를 집약한 책'으로 정의한 그는 꼭 한번 이런 책을 집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처럼 그에게 책은 일상의 동반자이자 기존 지식을 바탕으로 그만의 새로운 지식을 꽃 피우게 하는 자양분이다. 앞으로도 그는 자신이 읽는 책을 바탕으로 새로운 연구나 결과물을 내놓을 것이다. 때문에 그의 서재에서 엿 본 것은 단순한 책의 집합소가 아니라 앞으로 허 교수가 힘을 보탤 울산지역의 새로운 문화창출에 대한 가능성이자 그 문화를 기반으로 한 실제적인 지역민들의 삶이 개선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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