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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면도 없는 사이에 불쑥 집의 서재를 구경시켜 달라는 부탁에 흔쾌히 승낙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번 주 서재의 주인공 송은숙(50)시인은 그 범주에 들어가는 한 명이다. 그동안 운좋게 그와 같은 문인들도 더러 만났지만 목소리 한번 들어 본적 없는 사이에 단번에 허락이 구해진 경우는 잘 없었다. "작품이 너무 좋아 꼭 한번 만나뵙고 싶었다"는 다소 궁색한 인사가 더해지긴 했지만 전화기 너머 밝은 승낙이 어찌나 고마웠는지. 그런데 이 궁색한 인사는 승낙을 얻어내기 위한 헛 인사는 절대 아니었다. 지난 해 내가 만난 지역 문인들의 시집 중, 송 시인의 시집 <돌 속의 물고기>만큼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첫 시집이란 게 믿기지 않을만큼 와닿았던 그의 시들은 크게 유려하지 않음에도 서정적인 시어와 인생의 단면을 꿰뚫는 통찰력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그의 시를 보면 힘이 나기도 했고 때론 아팠던 마음이 위로되기도 했다. 그리고 송 시인의 서재에서 그런 시와 시어가 어떻게 영글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독일 성직자 A.켐티스의 말이 꼭 자기 얘기 같다는 송은숙 시인. 그에게 서재는 지나온 삶의 중요한 궤적들을 만날 수 있는 책들이 소중히 보관된 보물창고다.

 

 

 

대전에서 태어나 결혼 후 울산에 정착
출판사·독서교사 등 책과 함께 한 세월
지난해 통찰력 돋보이는 첫 시집 펴내

# 습관화된 책읽기
그렇게 지난 22일 찾게된 송 시인의 서재. 작품 말고는 시인에 대해 아는게 없던터라 어쩔 수 없이 신상조사부터 시작했다. 대전이 고향인 그는 결혼을 하며 남편을 따라 울산에 오게 됐다. 결혼 전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그는 이후 동여중 등에서 기간제 교사를 했고 현재는 초등학교와 도서관 등에서 아이들에게 독서논술을 가르치고 있다.
 아이들에게 어릴때부터 독서교육을 시킨 탓인지 송 시인의 집에서도 눈에 띄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막내 아들 방문에 붙어있는 '독서계획표'. 한 권씩 읽을 때마다 빈 칸에 책을 읽었단 표시를 한다는데 100칸정도 되는 빈칸을 다 채우면 피자 한 판을 선물로 받는단다. 두세달이면 너끈히 채우는 아들은 벌써 피자를 몇 판이나 시켜 먹었다. 다른 교육은 안 시켜도 어릴때부터 책읽는 환경은 조성해 줬다는 이들 부부의 비결은 효과를 발휘한 것인지, 큰 아들은 서울대에 입학해 공부비법을 담은 책도 출간했다.
 
# 장르넘나드는 잡식성 독서 스타일
그의 서재에는 다양한 책들이 눈길을 끈다. <거의 모든 것의 역사> <육식의 종말> <아톰의 시대에서 코난의 시대>와 같은 사회과학 서적부터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 같은 판타지, <코르트 말테제> 같은 만화책, 미술 기행서 <고뇌의 원근법> 까지. 실로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책들이 있는 이유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많은 송 시인의 '잡식성 독서'스타일 때문이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읽는 판타지나 만화책이 재밌다는 그의 모습은 의외의 모습이었다. 또 집 근처에 남부도서관이 있어 대부분의 책은 빌려본다는 송 시인. 이렇게 독서광인 송 시인을 맨 처음 책의 세계로 이끈 운명의 책이 궁금했다.
 
# 독서로 얻은 삶의 철학
누구에게나 '운명의 첫 책'이 한 권쯤은 있듯, 송 시인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레미제라블>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급문고에서 처음 접한 문학책이었다는 그의 얘기가 처음엔 의아했지만 당시는 집마다 책을 사보는 경우가 별로 없었다는 설명을 듣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를 시작으로 계몽사판 세계명작전집을 독파해 나간 그는 소공녀, 알프스 소녀 하이디 등 많은 동화와 파브르 곤충기와 시튼 동물기 등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첫 책에 눈 뜬 뒤로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책을 읽기 시작한 그는 어느 날부턴가 담임 선생님이 퇴근할때쯤에야 함께 교문을 나서게 됐다. 그게 이어지자 선생님이 아예 퇴근할 때 열쇠를 맡기고 문단속을 당부하며 떠날때도 있었다. 그는 수업이 끝나고 교실에 혼자 남아 책을 읽다 텅 빈 운동장을 걸어 나오는 게 좋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노라고 고백했다. 시인이 된 지금도 언젠가는 동화나 소설을 쓰는게 꿈이다.

 

 

 

   
▲ 여고시절 작품을 실었던 교지 <구조>와 문예지 <돌샘>, 대학시절부터 활동한 <화요문학>의 동인지.

 


 이후의 독서도 잡식성으로 이뤄졌다. 중학교 2학년 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 충격을 받은 그는 '알베르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고서 하도 감동스러워 무조건 밖에 나가 뛴 것처럼' 자신도 밖에 나와 한없이 걸었던 적도 있다고 회상했다. 고등학교 때는 당시 한참 읽히던 전혜린의 에세이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슈바벤이란 이국적인 장소가 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책을 읽은 시기인 대학 시절. 그는 우선 박경리의 <토지>를 읽느라 밤을 새웠던 기억부터 끄집어냈다. 김은국의 <순교자>, 님 웨일즈의 <아리랑>, 고미카와 준페이의 <인간의 조건>, 페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도 있었다. 그 외에 황석영과 박영한, 한수산 등의 소설과 황동규, 이성복, 김명인, 김광규 등의 시는 곧 그의 대학시절을 그 자체다. 특히 김명인의 시는 이후 시작 활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정도로 그의 마음을 이끌었다.
 
# 일상이 되어버린 글과 문학
서재를 구경하다보니 그가 대전여고 재학시절 문예반에서 만든 교지인 <구조>와 대학때부터 동인이었던 <화요문학>도 보였다. 결국 송 시인에게 글과 문학은 중고교 시절부터 아니 이미 이전부터 일상과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첫 시집이긴 했지만 그의 글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시인의 몸속에서 그 씨앗을 움텄을 것이다. 그 씨앗은 이후 수많은 책과 삶에서 체특한 것들을 자양분 삼아 열매로 맺어졌을 것이다. 결국 그의 머릿속에서 이렇게 영근 것들은 조금씩 바깥에 살결을 보여주다 활짝 피어날 기회만 엿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그의 시의 비결을 묻고자 했던 질문이 얼마나 우문이었는지를 생각하며 그의 집을 나섰다. 배웅해주는 송 시인 부부와 언뜻 스친 아파트 앞 풍경이 어찌나 따뜻하고 멋진지 또 한번 찾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단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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