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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산 통도사 영각(影閣) 앞 마당 한 켠에서 절정을 이룬 홍매화. '자장매'라고 불리는 이 홍매화를 피어올린 매화나무는 350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키고 서 있다. 이창균기자 photo@ulsanpress.net
지금쯤 양산의 통도사는 알싸한 홍매화 향기가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그 매향을 못 잊어 무던히도 다녔다. 아침 이슬이 내린 홍매화, 저녁 햇살이 기댄 홍매화도 잊을 수 없는 유혹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
언양 시가지에서 삼남면 가천리를 지나자마자 적멸보궁(寂滅寶宮) 입간판이다. 적멸보궁은 온갖 번뇌 망상이 적멸한 보배로운 궁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은 영취산 통도사의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정선 고한  정암사 적멸보궁 등이다.


 통도사 일주문으로 드는 길에 붙여진 이름은 무풍한송(舞風寒松)이다. 춤추는 바람을 따라 노송이 물결치는 길이란다. 일주문을 지나자 봄바람이 실어온 솔향이 향긋하다. 평일인데도 붉은 소나무가 물결치는 길을 걷는 이가 많다. 저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길이 1,400년이란 시간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까. 낙낙장송의 숲을 걷는 사람들이 작고 볼품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쁜 일정만 아니었다면 나도 그들과 어울렸을 것이다. 산문에 들어서기 전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데,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는 나의 오만을 꺾을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웅전 네면에 각기 다른 편액
사천왕문을 넘어 넓은 절 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이 버티고 있다. 특이한 것은 이 대웅전의 네 면에 각기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있다는 것이다. 앞면인 남쪽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 동쪽에는 대웅전(大雄殿), 서쪽에는 대방광전(大方廣殿), 북쪽에는 적멸보궁.


 들어가면서 바로 보이는 면이 동쪽 면인데 여기에는 대웅전이라는 편액이 힘이 넘친다. 이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불당이라는 뜻이다. 구룡지 쪽에서 보이는 서쪽면에는 대방광전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있는 대사리단에서 보면 적멸보궁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이라는 뜻이다. 남쪽면에 있는 금강계단은 사리탑에 부속된 예배처로 불자들이 유리를 통해 사리탑을 보며 불공을 드릴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자장매의 암향에 감동과 떨림
대웅전에서 합장한 후 눈을 돌리니 영각 앞의 늙은 매화나무에서 피어난 홍매화는 이제 막 절정이다. 350년 된 이 매화나무는 해마다 가장 먼저 꽃눈을 틔운다고 한다. 이 매화는 우리나라 홍매의 표준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자태가 빼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절집 이름을 따 '자장매'라고도 불린다.


▲ 서운암 장독대 언덕에서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린 매화.
 때마침 파란 하늘과 어울린 홍매화가 더욱 돋보인다. 꽃잎들이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여인의 청초함과 우아함을 닮았다. 동지 때부터 날마다 홍매화를 그렸다는 옛 선비들의 마음이 보이는 것 같다.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피어나는 매화 꽃은 선비들에게 불의에 굽히지 않는 지조와 절개를 상징했다.


 아마도 봄비가 내린 후인 이번 주말엔 자장매가 꽃비로 내릴지도 모르겠다. 이 매화나무 옆에는 키 작은 청매화가 이제 막 정갈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영각 모퉁이에는 산수유 나무가 연노랑 색의 새잎을 내기 시작했다. 


 영산전 곁의 매화나무 두 그루에도 붉은색과 연분홍빛의 매화가 제법 탐스럽게 피었다. 자장매에 비해 규모가 작긴 하지만 화단으로 조성된 곳에 핀 탓에 더욱 정갈한 모습니다.


 옛 선비들은 봄은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매향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여겼다. 매혹적인 감동과 영혼의 떨림이 있기 때문이다. 사위가 적막할 때 먼 곳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긴다는 뜻으로 암향(暗香)이라고도 했다.

#사진 좋아하는 이들의 봄날 성지
홍매화 향기가 가득한 통도사는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이 반드시 거치는 봄날의 성지 같은 곳이다. 이날도 줄잡아 20여명의 사진애호가들이 영각과 영산전 곁 홍매화를 담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혹시 내가 알지 못하는 통도사 홍매화의 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으로 왜 하필 절 집의 홍매화인지를 물었다.


 포항에서 새벽에 출발해 한나절을 작업하고 있다는 50대 사진작가는 "매화는 아무데서나 찍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주변의 건축물과 이렇게 어울리는 홍매화는 여기밖에 없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손짓을 따라가 보니 절집 건물의 유려한 처마선이 보였다. 빛바랜 단청과 정교한 꽃문양의 문살도 눈에 들어온다. 붉은 매화와 어우러져 한 폭이 그림이 되었다.


 그에게 "홍매화는 절망의 끝에서 피어올린 절정"이라고 화답했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마른 가지 끝에서 피어난 선홍빛 꽃의 느낌이 그랬다. 절망의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가 바싹 마른 가지에서 문득 피어오른 홍매화 한 떨기라도 볼 수 있다면 희망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홍매화 앞에서 합장하는 보살들의 얼굴이 유난히 편안해 보인다.

#서운암·극락암도 활짝

▲ 영각 앞 홍매화를 담기에 여념이 없는 사진 애호가들.
통도사가 거느리고 있는 암자에도 지금 봄 향기로 가득하다. 통도사가 거느린 산내 암자는 모두 19개. 말이 암자지 웬만한 절집보다 규모가 크다. 통도사 암자 중에서 가장 알려진 곳이 바로 서운암이다. 통도사 주차장에서 잘 포장된 산길을 따라 보타암과 취운암을 지나면 곧 서운암이다. 영축산 능선이 주르륵 펼쳐진 너른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서운암은 도량을 가꾸는 방식이 독특하다. 서운암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붙잡는 것은 늘어서 있는 2,000개가 넘는 장독들이다. 절집을 배경으로 늘어건 장독대 주변으로 홍매화들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꽃 봉우리가 부풀러있다. 이 역시 이번 주말이면 환한 꽃을 피울 것 같다.


 서운암에서 나와 근현대의 고승인 경봉 스님이 머물며 깨달음을 얻었다는 극락암으로 향했다. 영취산 자락의 극락암은 빽빽한 적송으로 가득한 숲길을 지나야 하다. 극락암 절집 주위에도 홍매화 몇 그루가 피어 벌써 봄맞이를 하고 있다. 극락암에는 영취산봉우리가 비친다는 연못인 극락영지와 그 위에 아치형으로 놓인 홍교가 아름답다. 좁은 홍교를 조심스레 건너면 저절로 다소곳해져 별도로 절집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통도사의 홍매화는 이번 주말이 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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