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올해는 울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울산'이 기록상에 나타나는 것은 조선 태종 때 (1413)로 이 당시 조선은 전국적으로 행정체제를 개편했다.울산 이전의 명칭은 울주, 공화(恭化), 흥례(興禮), 하곡(河谷), 굴아화(屈阿火)로 불렸다. 울주라는 명칭은 고려 현종 때부터 사용했다.
 

 '울산'이라는 지명의 어원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우시산국(于尸山國)'에서 부터 추정된다. 우시산국은 신라초 탈해왕 때 신라에 합병되었다가 '우화(于火)'로, 신라 경덕왕 때는 우풍(虞風)으로 다시 바뀐다. 어조사 '우'와 죽음 '시', 뫼 '산'으로 이루어진 '우시산'은 '우(于)'와 '시(尸)'가 합쳐져서 '울'이 되기 때문에 우리말 '우리(울, 울타리)'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시산국'은 '산이 물처럼 둘러싼 나라'라는 의미가 있다.
 

 울산의 또 다른 옛이름으로 '굴아화(屈阿火)'는 굽은 강이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굽은(屈) 강(阿) 벌(=고을, 火)이라는 의미의 이두식 표기이다. 지금의 범서읍 선바위(立岩) 부근에서 크게 굽어 돌아가는 태화강을 그대로 표현한 지명이다. 소읍국(小邑國)이었던 우시산과 굴아화는 비슷한 시기에 함께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우시산'이 울주군 웅촌면 검단리 분지쪽의 세력이었던 반면, '굴아화'는 태화강가인 다운동과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 등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펼쳤다. '굴아화' 즉, 굴아벌은 신라 5대 임금인 파사왕(80~112년)때 신라에 병합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굴화(屈火)'라는 두글자 지명으로 축약됐다. 굴화는 이후 하곡(河曲)현으로 바뀐 뒤 '울주'로 편입돼 사라지고. 굴화역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조선 말기(1914년)부터 '굴화리'라는 지명으로 되살아나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우시산국의 영역에 대해 학계에서는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와 검단리쪽을 중심부, 또 양산시 웅상읍까지 세력이 뻗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웅촌면 일대에 우시산국의 비중을 두는 것은 이곳에서 대대리 고분군과 검단리 유적 등이 발굴됐기 때문이다.
   고분에서는 여러 종류의 토기와 쇠칼, 쇠창 등의 철제무기류, 옥제장신구, 청동제 세발솥 이 출토됐다. 이중 청동제 세발솥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우시산국의 존재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세발솥은 주로 중국에서 유행했던 것으로 황제가 제후들의 신분을 상징하는 부장품이다. 이를 근거로 우시산국은 북방계의 이주로 세워진 국가로 보는 견해가 많다.
 

 이같은 추론을 미루어 볼 때 우시산국보다 오래 전 울산에 삶의 터전을 꾸렸던 이들이 반구대암각화를 남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북방계의 남하와 해양민족의 한반도 진출이 울산의 뿌리라는 가설이 가능한 대목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