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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두는 단연 '안녕들 하십니까'인 것 같다. 고려대학교 대자보에서 시작된 '안녕'에 대한 질문은, 넘쳐나는 사회 문제와 갑자기 추워진 날씨, 오랜만에 등장한 전지를 가득 메운 손글씨 때문인지 울림과 파장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 한때 낙양의 지가를 올렸던 '아프니까 청춘이다'에 대한 젊은이들의 직접적인 답과 같은 형태라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답은 이렇다. 그러지 않아도 불안한 우리를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지 마라.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안녕 하십니까'가 아닌 '안녕들 하십니까'의 '들'이다. 안녕 하십니까가 일대일이라면 안녕'들' 하십니까는 다대다이다. 일대일의 관계가 줄이라면 다대다의 관계는 그물이다. 줄은 악수한 손을 놓는 순간 끊어진다. 돌아서면 남이거나 남보다 더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물은 관계의 틀을 유지하면서 다시 고치거나 기워갈 수 있다. 사람들은 줄이 아닌 그물의 관계망에 목이 마른 것이다.

 줄과 그물의 관계는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가 '미래 이후'에서 제시한 접속과 결속의 관계와 비슷하다. '결속은 타자-되기로, 각자의 특이성들은 서로 결속될 때 변한다. 결속되기 전과는 다른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바꾸고, 외부에 있는 기호들의 조합이 앞서 존재한 적이 없는 의미들을 탄생시킨다. 반대로 접속에서는 각 요소가 구별된 채로 남으며 기능적으로만 상호작용 한다'고 비포는 주장하고 있다. 접속이 스쳐 지나가는 관계라면 결속은 손을 마주 잡고 대화를 나누는 관계라고나 할까. 그 대화가 서로를 변화시킨다.

 접속은 편리하고 부담스럽지 않다. 개인의 생활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정서에 충실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제 접속의 관계에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동안 맛있는 음식과 여행지 사진으로 포장된 페이스북 뒤에서 사실 외롭고 안녕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의 안녕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안녕들 하십니까'엔 이처럼 시대에 대한 불안과 아울러 이기적이고 무심했던 자신들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 들어 있다.

 이러한 반성과 이웃에 대한 관심이 낳은 기적 같은 사례가 있다. 2006년에 만들어진 시부야 대학이 그것이다. 시부야는 인구 20만 정도의, 도쿄에 있는 한 구이다. 대학을 졸업한 뒤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던 사쿄 씨는 어느 날 다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웃과 소통하는 '연대와 협력'의 삶을. 사쿄 씨는 회사를 그만두고 '마을을 캠퍼스로'라는 기치 아래 주민들이 가르치고 주민들이 배운다는 계획을 세워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한다.

    예컨대 손님이 없는 오전에는 커피숍이 강의실이 되어 누군가를 가르치길 원하는 주민이 수강생을 모아 가르치는 식이다. 제대로 된 캠퍼스도 전문적인 강사진도 없는 데 잘될까라는 우려는 곧 기우임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기꺼이 재능을 나누고 가르치고 배워나갔다. 만남을 통해 각종 커뮤니티를 만들고 지역사회를 변화시켜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나라도 수원에서 이를 벤치마킹하여 '누구나 학교'를 열었는데 주민들의 호응이 대단하다고 한다.

    말 그대로 누구나 가르치고 누구나 배울 수 있는 열린 학교인 셈이다. 줄이 아닌 그물, 접속이 아닌 결속이 더 단단하고, 더 오래가고 더 끈질긴 법이다. 시부야와 수원의 주민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물의 그물코가 되어 커다란 공동체를 이루어 안녕들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연대와 협력'의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리고 이 연대와 협력을 통한 결속에 안녕'들'에 대한 해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12월의 바람이 차다. 이 추위에 복효근 시인의 <얼음 연못>이라는 따뜻한 시 한편을, '안녕들 하십니까'하고 아프게 묻는 청춘들에게 바친다.

 얼음 위에 누가 저렇게 돌을 던졌을까  / 구멍 난 가슴을 덮으려 / 연못은 더 많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았겠다 / 나이테처럼 얼음을 덧입고 / 얼음의 근육들이 자란다 / 더러 뚫고 지나가지 못한 돌들이 / 얼음에 박혀 있다 /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 / 뿌리처럼 퍼져나가 스크럼을 짜고 / 상처가 상처끼리 연대한다/ 한번 부러졌던 뼈처럼 / 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연못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 돌 몇 개로 무너진다면 얼음은 얼음도 아니다 / 돌 몇 개로 메워질 연못이라면 연못도 아니다 / 큰 돌이 넉넉하게 박힌 얼음이라면 / 맘 놓고 들어가도 좋겠다 / 돌 몇 개는 제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그대들, 부디 안녕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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