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5월 18일,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향년 94세. 장작불이 사위어지듯 조금씩 조금씩 생기를 잃어가신 터라 자녀, 손자들 모두 자리를 지킨 평온한 임종이셨다.

 돌이켜보면 어머니와의 관계는 마지막 모습처럼 대체로 평화롭고 순탄했던 것 같다. 물론 소소한 갈등이나 불협화음이 없을 수야 없었지만 돌아가시니 모두가 안타깝고 애틋한 지난 추억이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울산에 와서 어머니와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의사소통의 문제였다. 남편이 막내라 어머니를 직접 모시지는 않고 가끔씩 다니러 가셨는데, 그때마다 말 때문에 곤욕을 치르곤 했다. 나는 대전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평생을 경주 인근에서 지내신 경주 토박이시다. 지금이야 거의 다 뜻을 알지만 지렁(간장), 돌개(도라지), 골미(가래떡), 추자(호두), 철뱅이(잠자리) 같은 일상용어들이 당시엔 콧등에 땀이 맺힐 만큼 낯설고 어려웠다. 새구롭다(시큼하다), 냉구롭다(매캐하다), 포시랍다(호강스럽다) 같은 형용사는 또 어떤가? 어머니 또한 윗지방에서 왔다는 며느리의 말을 못 알아들으셔서 몹시 갑갑하셨을 것이다.

 또 하나는 종교의 다름이었다. 나는 결혼 이후지만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이고, 어머니는 열성적이진 않지만 초파일에 식구들의 이름을 적어 연등을 올리거나 하는 불교 신자이시다. 그래서 어머니가 오신다면 십자가와 성모상을 미리 장롱 속에 숨겨 놓곤 했다. 벌써 오래 전 얘기지만, 그날은 어머니가 다녀가신 후 장롱 속의 성모상을 꺼내보니 세로로 금이 좌악 나있는 것이었다. 유치원생이던 딸아이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가 방바닥에 패대기를 치셨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거기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으셨다. 나중엔 "지차는 종교가 달라도 된다."고 용인을 하셨는데, 금기가 깨져서인지 그때는 이미 나의 신앙이 많이 무뎌진 상태였다.

 이런저런 갈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큰 마찰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주머니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머니는 속바지에 커다란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꿰매놓고 중요한 물건을 넣어두곤 하셨다. 며칠 머물다 돌아가실 때쯤 우리가 맛있는 것 사드시라고 용돈을 드리면, 그걸 받아두신 다음 주머니에서 더 많은 돈을 꺼내 함께 돌려주셨다. 아마 당신은 사업을 하는 둘째에 비해 박봉의 공무원인 막내아들이 늘 눈에 밟히셨나 보다. 잘사는 아들집에서 받은 용돈을 모아두셨다가 좀 못사는 아들네에 와서 모두 풀어 놓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돈이란 것이 돌돌 말리고 접혀 있어서 한 번에 잘 펴지지도 않았다. 그런 돈뭉치를 "암말도 마라."하고 손에 쥐어 주시면서 훌쩍 일어나 가시는 것이다. 그 돈은 세 아이를 기르며 허덕대던 우리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것이어서 요긴한 도움이 됐다. 나중에 돌아가신 뒤 초제를 모시면서 보니, 어머니 주머니에 돌돌 말린 지폐뭉치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막내아들에게 미처 전해지지 못한 그 돈은 저승길의 노잣돈으로 기꺼이 제상에 올려졌다.

 어머니는 요양병원으로 가시기 전 몇 해 동안을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기력이 많이 약해지셔서, 여전히 서툴고 야무지지 못한 내 살림솜씨를 눈감아주고 용납해주셨다. 이젠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이 우리는 평화롭게 몇 해를 보냈다. 노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는 노래자(老萊子)처럼은 아니지만, 남편은 그 나이에도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눕거나 쭈그러진 가슴을 만지며 장난을 치면서 막내 노릇을 했다. 말년에는 잘 걷지 못하고 나중엔 거의 배를 빌면서 움직이셨다. 그리고 결국 앉지도 서지도 못하셔서 요양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지난 일요일엔 남편과 함께 어머니 산소를 찾았다. 가끔씩 비가 와서 그새 잔디가 파랗게 자라고 있었다. 가는 길에 산딸기가 보이길래 따서 종이컵에 담아 산소 앞에 두고 절을 했다. 그리고 근처에 둘레둘레 있는 친척들 산소를 둘러보다가 산딸기가 가득 달린 덤불을 발견하였다. 올라올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풍성한 것으로, 나는 그렇게 많이 달린 산딸기를 처음 보았다. 유월의 산딸기는 오월의 장미처럼 붉고 탐스러웠다. 우리는 연신 입에 넣으며 봉지에 담으며 정신없이 산딸기를 땄다. 그리고 돌이올 때는 큰집에 들러 상추와 부추를 한아름 얻어왔다. 갈 때는 빈손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두 손 가득 먹을 것이 들려진 것이다.  "엄마의 주머니가 원채 깊다." 남편의 말에 나도 수긍을 했다. 한번씩 다녀가실 때마다 돌아앉아 주머니 속에서 돌돌 말린 돈을 꺼내 "암말 마라." 하고 쥐어주시던 어머니. 우리 방문을 저 붉은 웃음으로 맞으며 두 손 가득 또 뭔가를 쥐어주시는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