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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학연구소장

다시 태화루에 올랐다. 울산시 중구 태화로 300, 남향의 누각은 2층에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사방을 바라볼 수 있다. 주심포 양식에 배흘림 기둥과 기와, 단청이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를 풍긴다. 강과 산 그리고 대밭을 바라보는 태화강 하류의 뷰포인트로서도 좋은 곳이다.

 강 건너 남산 봉우리엔 몇 개의 정자가 보이고 이휴정과 장춘오, 만회정의 위치도 가늠할 수 있다. 태화루 아래는 용금소 언덕이다. 깎아지른 듯 아득한 낭떠러지요 험하고 가파른 벼랑이다. 발을 헛디뎌도 안되고 한눈 팔고 걸어서도 안된다. 젊은 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의 경계로 삼을 일이다. 

 새로 지어진 태화루는 태화강의 경관을 바라보는 명소이자 휴식의 장소요 예술무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신라의 호국사찰 태화사에서 시작된 이름이니 역사성이나 유서가 깊다. 그동안 흔적을 남긴 이들의 면면이나 남겨진 시와 글도 예사롭지 않다. 다만 현재의 장소성과 주변과의 조화, 감동이 적은 게 흠이다. 태화루 주변은 5일마다 장날이라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강과 산의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이런 세속을 예상이라도 한 듯 강 건너 이휴정은 이렇게 이름 지어졌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유유자적하고 세상에 공명(功名)을 구하는 대신 산에 쉬고 물에 쉬는 것이 좋다.'

 세월의 무게만큼 많은 이야기가 있는 태화루에는 이휴정 이동영과 괴천 박창우의 우정도 있다. 이동영은 학성 이씨 시조 이 예의 10세손으로 이휴정을 지은 울산 선비이고 박창우는 밀양 박씨로 영천에서 북구로 옮겨온 송정 박씨 입향조이다. 두 분이 함께했던 시기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이었다.

 두 분은 당대 제일인자라는 허목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호형호제하던 사이로 1666년 소과에 함께 급제했다. 1664년 이휴정의 권유와 도움으로 괴천공은 영천에서 울산으로 옮겨 온다. 남이록(南移錄)에는 친구의 권유로 울산에 도착하니 여섯 문의 집과 곡식 서른 꾸러미, 옹기 등 살림이 으리으리하게 준비돼 있었다고 적혀 있다. 구강서원을 건립해 함께 후학 양성에 매진하며 또 선비의 의리를 지키며 태화루에 올라 시를 남기며 우정을 쌓았다. 울산의 선비들은 지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서원 건립이 절실했고, 제대로 된 선비가 필요한 참에 괴천공을 울산에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선비의 우정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두 가문 후손들이 만든 강의계(講誼契)는 현재도 돈독한 편이다. 양가의 후손 100여 명이 6월이면 번갈아 양 문중을 방문하고 선양사업과 묘제 참배 등 우정을 간직하고 있다. 이휴정은 1667년에, 괴천공은 1702년에 돌아갔으니 300여 년 전의 선비의 우정을 후손들이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안동의 우향계가 500년을 지속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으니 시대를 뛰어넘는 의리와 인연이라 할만하다.

 태화루에 가면 그냥 예와 풍경에만 취할 바가 아니다. 지난 세월, 서로 마음을 전하는 친구가 있는지. 어쩌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벗을 위해 기꺼이 내 것을 나눠주고 더 많은 것을 보내지 못해 안타까워할 친구는 몇이나 되는지. 기쁨은 함께하고 충고는 엄하게 할 수 있는 참된 벗이 아직도 내 곁에 있는지를 자문해 볼 일이다. 선비의 우정을 되새기며 태화루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곰곰이 생각해 봐도 이런 친구 내게는 없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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