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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나도 그렇지만,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윤동주를 꼽는다. 아마 교과서에 실린 <서시>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겠는데, 나는 그보다 <별 헤는 밤>을 좋아해서 그 긴 시를 노트에 옮겨 쓴 적이 있다. 그 시는 소리 내어 읽을 때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하는 부분에서 늘 코끝이 찡해지곤 했다. 정음사에서 나온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잉크가 쏟아져서 시집이 파랗게 물이 드는 바람에 오랫동안 속상해하던 기억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자기 성찰의 비극적 의지-윤동주 시론>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평론(?) 비슷한 것을 써서 동아리 문집에 발표하기도 했다. 저작권이나 표절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던 때여서 여기저기 다른 글들을 짜깁기한 수준이지만, 처음으로 써 본 평론이라 나름 열심히 윤동주에 관한 글들을 읽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준익 감독의 <동주>란 영화가 개봉됐을 때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가장 빨리, 그러니까 개봉 둘째 날 영화를 보러 갔다. 동주 역으로 나오는 강하늘이 낭송하는 시처럼 잔잔하고 서정적인 흑백영화였다. 영화는 동주가 옥사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취조를 받는 장면을 현재로 하여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고향인 북간도 명동촌과 연희전문을 다니던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온 뒤 도쿄와 교토를 배경으로 서사를 끌어가는데, 그에 어울리는 시 낭송음이 배경으로 깔려 뭉클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주는 미덕은 동주의 고종사촌인 송몽규의 발견이다. 몽규는 동주와 같은 해, 같은 집에서 태어나 같이 자라고, 같이 연희전문을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을 하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같은 해 사망을 한 동주의 분신과 같은 존재이다.

 몽규는 열여덟 살에 '숟가락'이란 꽁트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독립운동가의 길을 걷기 위해 문학의 꿈을 접는다. 대신 동주에게 시인의 길을 걸으라고 부추기고, 동주는 식민지 현실에서 몽규처럼 행동하지 못하고 시를 쓰고 있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낀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와 같이 윤동주의 시에는 부끄러운 감정을 고백하는 시들이 많은데,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서도 바로 부끄러움이다.

 우리말과 글을 쓰지 못하고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기를 강요당하는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부끄러움, 그 현실에 몽규와 달리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그저 한줄 시를 쓰고 있다는 부끄러움. 그래서 몽규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고 단호하지만 동주의 눈빛은 주저하고 괴로워하며 흔들린다.

 이러한 몽규와 동주의 관계를 혹자는 과정의 아름다움과 결과의 아름다움으로 보기도 한다. 송몽규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재기에 넘쳐 기대를 한 몸에 받다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지만 지금은 잊혀진 존재가 되었고, 윤동주는 몽규의 그늘에 가리고 생전엔 시인이라 변변히 불리지도 못했지만 사후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계관시인 같은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는 <동주>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몽규에게도 고르게 시선을 보낸다. 아까 말했듯이 둘은 방식은 달랐지만 서로의 분신, 서로의 페르소나,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어찌 이분법적으로 재단할 수 있으랴. 모두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다 갔고, 조촐하게 든 인상 깊게 든 한 줄의 이름을 역사에 남겼으니 말이다.

 열아홉 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홀로 군관학교를 찾아간 몽규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섬세한 시심으로 심금을 울리는 시를 쓴 동주.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고 그들은 바랐지만 채 서른도 못 채우고 그들의 청춘은 이국땅에서 스러진다.

 하지만 그 짧은 삶에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다. 찬란히 빛나는 시기에 정신과 영혼을 바쳐 무언가에, 그러니까 그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헌신한 까닭은 그 헌신의 대상이 고통 받는 것이 괴롭고 부끄러워서이다. 부끄러움. 양심에 거리낌이 있어 떳떳하지 못한 마음.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 양심적인 두 젊은이의 삶의 행적은 오늘의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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