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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오월의 이른 아침에 기차를 타고 떠나는 일은 나를 설레게 한다. 차량 한 칸에 서너 사람이 앉아 가는 일이 좋아할 일만은 아니지만 산만하지 않아 좋다.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풍경 속에 유독 농가 한 채가 내 안에 들어온다.

    집 주변에 듬성듬성 흩어져 있는 소소한 것들은 그 존재는 물론 의미조차 미미해 보였지만 앉은 모양새는 당당하다. 그리 넓지 않은 토지와 푸성귀, 그리고 도랑과 낡은 손수레, 울타리에 걸려 일렁이는 한 가닥의 전깃줄과 허름한 창고는 얕볼 수 없는 그 집의 오래된 배경이다.

 멀리 새끼줄 같은 농로가 대문간에 뱀 꼬리처럼 심심하게 물려 있다. 길은 그 집에 사는 사람들과 지인들이, 때로는 경운기나 누렁이가 이따금 지나다니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희미하지만 외줄기의 길은 집의 존재를 명징하게 하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웅숭깊게 하리라. 그래서 유의미하지 않을 것 같은 주변의 요소들과도 더불어 집의 의미를 만들고 마침내 인간 삶의 가치를 빛나게 한다.

 한가로이 창 밖 풍경에 넋을 놓고 있지만 실은 내 짐꾸러미 속에는 추어탕 한 그릇이 있다. 일요일이라 아들에게 잠시 다니러 가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걸리던 서울길이 네다섯 시간이면 다녀올 수 있게 돼 새벽 기차를 탔다. 아침 식탁에 아들이 좋아하는 추어탕을 올리는 깜짝 선물을 하고 싶어서다.

 다른 부모들처럼 살뜰히 자식을 살피고 거둘 여유가 없어 자식 건사하는 일을 소가 풀 뜯어 먹듯이 했다. 며칠 전 안부 전화를 한 아들 목소리에 기운이 고르지 못한 것을 느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직장생활이 얼마나 버거운가. 마침 일요일이라 생활 검열 같지만 어미의 응원을 담아 추어탕 한 그릇을 배달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세수도 하지 않은 아들은 갑작스런 어미의 방문에 눈이 등잔만 했다. 좀 머쓱하긴 해도 모처럼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고 웃음도 나왔다. "추어탕 배달 왔다"며 히죽거리는 나를 향해 보기 드물게 비싼 추어탕이라며 저도 웃는다. 나도 바쁜 사람이니 아침 식사하면 내려갈 거라고 선수를 쳤다. 아들은 어미가 끓여온 추어탕을 먹으며 검버섯 핀 작은 손으로 머리며 등을 쓸어주던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시어른은 손자가 유난히 좋아하던 추어탕을 자주 끓였다. 초여름부터 입동 언저리까지 가족들의 허한 기운을 돋우는 보양식으로는 추어탕을 으뜸으로 여겼다. 어머님표 추어탕은 웬만한 사람은 끓일 엄두를 낼 수 없다. 푸성귀는 직접 재배하고 미꾸라지는 주변에서 구한다. 봄부터 텃밭에 얼갈이배추와 고추, 방앗잎, 부추, 마늘, 양파 등을 부지런히 가꾼다. 된장과 간장을 담그고 울타리 밖에는 산초나무도 한 그루 심어 두었다.

 젊을 때는 그런 어머님이 유난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시어른의 추어탕관이 내 안에 스며든 것일까. '보약이다'라는 말을 내가 쓰고 있다. 지금 우리 집 텃밭은 예전의 어머님 영토의 그것과 꼭 닮아가고 있다. 그뿐 아니라 아예 새벽에 서울까지 추어탕을 나르기에 이른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어른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에서 어머님만이 가족들에게 만들어줄 수 있던 추어탕이 바로 농가를 풍족하게 하고 건강하게 하는 두엄더미와 닮아 있음을 깨달았다. 수많은 요소가 섞인 두엄은 농작물을 키워 사람을 이롭게 한다. 어머님이 끓인 추어탕 또한 몇 철 동안 정성과 지혜를 모아 빚은 후 가족의 기운을 돋우어 준다. 그러니 세상을 밝히는 거름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나는 일상 속의 소소한 삶에 대한 깊은 통찰 없이 허겁지겁 겉만 보면서 산 것 같다.

 지금까지 무심코 보아온 주변의 생활 수단들도 널브러져 있는 것 같지만 작은 돌다리 하나도 무용한 것이 없다. 모두 제 위치에서 존재 이유에 합당한 몫을 해내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도 더욱 실다울 수 있었던 게다. 다만 내가 그것을 한 줄에 꿰어 읽어내는 지혜를 갖지 못했을 뿐이다.

 나의 이런 삶의 자세는 아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일상 중에서 아들에게 의미 있는 일마저 나는 무심히 지나쳤을 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지나간 일도 있었을 듯하다. 부모의 의무를 핑계로 막연하게 눈에 띄는 큼직한 것들만 좇았는지도 모른다. 지나고 보니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미세한 환경들조차 한 사람의 생애를 견고하게 하는 바탕을 이룬다는 것을 간과한 적이 많았다.

 자괴지심 때문인지 아들이 안부를 묻는 전화 목소리에서 기운이 고르지 못함을 은연중에 느꼈다. 겉모습은 남과 다르지 않아도 오르막을 만나면 혹여 무시로 숨결이 거칠어지지나 않을는지. 배가 불러도 허기를 느끼는 팍팍한 세상이 아닌가. 어머님의 정성과 비법이 담긴 보약 같은 추어탕 한 그릇이 아들의 내면풍경을 그득하게 하는 또 하나의 든든한 배경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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