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운명(運命), 사람이 태어나면 운(運)이고 죽으면 명(命)이라고 했다.
 운명처럼 시작한 공직의 첫 발은 작은 시골마을 합천에서였다.
 17개 읍·면의 작은 합천에서 시작한 공직 생활이 어제 같은데 이곳 북구 양정동에서 공직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을 남겨두니 만감이 교차한다. 녹봉을 받은 지 5년이 되어갈 때쯤이었다.
 고향 면인 삼가에서 산업계 행정 7급으로 일하면서 36개 마을의 통일벼 종자 신청, 통일벼 지도, 가을이면 벼 매상(정부에서 수매해 가는 것) 등 힘든 일이 많아 사표를 던졌다.

 사표를 내고 셋방살이 집으로 돌아와 만삭인 아내를 보는 순간 사표를 던진 게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른다.
 동료의 만류로 겨우 3일 만에 다시 시작한 공직생활이 벌써 41년이라니 만감이 교차한다. 태어난 마을이 본래 빈촌이라 과일이라고는 생감(일반감) 나무가 전부였고, 단감이나 배, 포도는 아예 재배되지 않는 곳이었다.
 최근에야 산지개발로 밤나무가 심어지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지구온난화로 수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니 시골 생활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개간으로 감자, 고구마를 심어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논이라고는 4마지기 반 뿐이었다.

 형제는 5남매였는데, 중학교에 간다는 건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다행히 종형님이 '저 아이도 중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고 얘기한 게 도움이 돼 겨우 중학교는 갈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는 운 좋게도 시골고등학교(보통1반, 상과1반)에도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 어려운 형편에 도시에서 유학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어릴 적 꿈은 공무원이었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부산 먼 친척 댁에 점원으로 취직한 지 두 달이 채 되기 전 지방공무원 임용고시가 있었고 용케도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시골에서 공직생활을 절반쯤 했을 무렵, 울산이 광역시가 되고 공무원 정원이 대폭 늘어나 울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에는 낯설고 힘든 도시 생활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생면부지의 울산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난 것은 큰 인연이었다.

 공직생활의 하루하루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비가 오면 수해를 입을까 걱정, 추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피해를 보면 어쩌나 애꿎은 하늘만 바라봐야 했다.
 양정동장으로 근무하는 2년 동안 두 번의 산불 경험은 정말 기억하고 싶지 않다.
 끼니도 거르고 산불 진화에 발을 동동 구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하지만 행운도 많이 따랐다. 지난 2000년 말 체육청소년 담당을 1년 6개월간 하면서 수많은 체육 행사를 치렀는데 단 한 번도 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양정동장으로 1년에 크고 작은 행사를 여러 번 열었지만, 날씨는 항상 좋았다. 이 또한 큰 행운이지 않을까?
 후회는 앞서지 않는다. 행정의 시작도, 끝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예측행정으로 사전 기획하고 예상되는 문제를 먼저 도출해 내고, 닥쳐올 문제를 생각한다면 어떤 큰일도 반드시 해결해 낼 수 있다.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참고 견디니 좋은 결과가 되어 돌아왔고, 행운도 뒤따르지 않았던가?
 나보다 약하고 못난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고 소중히 여겼으니 그랬던 것 같다.

 얼마후면 인생 2막이 시작된다. 지금까지 돌아보지 못했던 주위부터 먼저 살피고 헤아려 보려 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서 정직함으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요즘 유행하는 노랫말처럼 누구나 한 번 왔다 가는 인생, 미련이야 많겠지만, 후회도 많겠지만, 어차피 한 번 왔다 가는 걸 붙잡을 수 없다면 소풍가듯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야겠다.
 내일이 찾아오기에 포기하지 않는 삶이 있고, 희망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 있다.
 당장 며칠은 습관처럼 일찍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고 있을 내 모습을 떠올려 보니 지난 40년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