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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젠 7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가 시작된지 얼마 전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이렇게 됐나 싶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고, 20세 때는 20㎞, 60세 때는 60㎞의 속도로 간다는 우스갯소리도 하는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먹으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현상은 사실 여러 요인과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면 같은 시간에 지각되는 정보 양이 적어지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보를 기억하는 양이 적어져서 그렇게 느껴지기도 한다. 치매환자를 보면 사실 오래전 '장기기억'은 많이 남아있는데, 최근의 '단기기억'은 손상돼 추억 속에서 더 많이 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뇌에서 문제가 발생돼 나타나는 '물리적'시간의 짧아짐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근원적 시간이라고 일컫는 우리의 '실존'시간은 현재 시점의 연속이 아닌 '존재'와 관계되는 시간으로, 실존이 열릴 때 출현하며 그 시간이라는 것이 현재에서의 시간만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 만나고 있는 존재자에서부터 존재가능으로 이끌기 위해 미리 앞서 가보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의 한 가능성에서부터 미래의 자신에로 다가가는 한, 그로써 우리는 또한 언제나 그것으로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과거'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실존론적 의미의 미래에는 실존론적 의미의 과거가 같이 속해 있다.

 인간은 그에게 나타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실존을 수행함으로써 그의 실존영역에 사물들을 나타나게 하는데,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지향하면서 시간을 소모하고 있어 그가 관심을 가진 '사건'에 따라, 그리고 주어진 시간에 그의 실존을 얼마만큼 성취하느냐에 따라 짧은 시간과 긴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여러 번 인용했던 사례의 환자분인데 그녀는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또는 가족과 외출하는 날을 달력에 표시하고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유토피아적 미래에 사는 것이지만 사실 그 미래는 그 자신 존재가능을 미리 앞서가 보는 식이 아닌 '눈앞'의 물리적 시간인 것이지 실존의 시간으로 열려있지 못하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에 미리 앞서 가 보기로 결단함으로써, 나의 존재 가능을 뚜렷하게,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고유한 존재가능으로 이해하게 된다.  

 노인이 되면 이젠 그 삶에서 이런 죽음 쪽으로 무게이동이 돼야 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자각은 사실 꼭 노인이 돼야 하는 것은 아니고, 태어남과 동시에 이미 죽기에는 충분히 늙어 있는 것이라고 그 죽음의 성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죽음이란 삶에서의 죽음이지 죽음을 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생생한 삶에 죽음을 당겨 와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자각을 갖는 것은 사실은 우리 삶을 그 전체에서 모양 잡게 만드는 것이다. 죽음의 전망이 없는 삶은 계속적으로 '유예'시키는 인생을 살게 만든다.

 인간이 이렇게 자신의 죽음까지 앞서가고 태어남으로 되돌아와서 현재로 리바운드할 수 있어 자신의 일생을 꿰뚫게 된다는 것은, 그 사이 시간에서 자신을 돌본다는 구조이기도 하다. 또한 그렇게 죽음에로 앞서가는 것은 '대중의 그들'로부터 빠져나오게 하며 자기 양심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빚'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결국 자신이 떠맡은 삶의 가능성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사실 모두 빚을 지고 있다. 그 빚을 다 갚은 인생을 살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그 양심의 소리가 없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그 '양심'을 아주 또렷이 드러내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라고 하늘에서 부여한 그 자신의 '빚'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아주 결연하게 나타내고 있지 않나. 이어서 노래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부여된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 같은 것인데 이 죄책감이 잎새에까지 낱낱이 밝혀져 있어 그의 하늘을 정말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며 별의 운행이 시간이라면 그 시간에서 죽음을 앞당기는 것으로 그는 자신의 전체 삶과 양심을 일깨우고 있다.

    그 양심의 호출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연에서 "오늘 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고 별에 바람의 스침을 이야기하는데, 시간이란 이렇게 별과 바람의 이동 같은 것이며, 이 스침의 시간이 자신에게 다가가고 되돌아오면서 마음속 양심의 소리로부터 일깨워지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윤동주 시인의 생애에서 그 시간이 길고 짧음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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