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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여름이 본격적으로 다가와서 열대야가 나타나고, 잠을 설치게 하고 있다. 그렇게 잠을 설치게 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중간 중간 꿈은 더 잘 기억이 되는 것 같고, 이제 이야기하려는 것도 그 꿈에 대한 것이다.

 꿈 같이 몽환적인 이야기인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 여름 밤의 꿈>이 쓰여진 것은 1595년쯤으로 본다. 그 연극을 대학 때 스쳐지나가듯 본 것 같은데, 시대도 다르고 지역도 다르지만 여운이 길게 가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에 상관없이 공통적인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1600년의 영국이라는 곳은 어떤 곳이었을까. 셰익스피어가 그 해에 이 희곡을 간행하였다는 것인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의 연극이 상연되는 것을 지켜보았을 텐데 그때의 여름밤은 어땠을까. 필자가 어렸을 때의 여름밤이 생각난다. 마당에 자리를 펴고  누워 쳐다보았던 하늘의 총총한 별들이 기억이 난다.

 1600년의 영국도 사람이 사는 것에서는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닐 것인데, 마당의 흙과 하늘의 별 그리고 물과 바다 같은 것, 이런 생활에 펼쳐져 있는 것이 다를 게 있나. 셰익스피어는 그 연극의 무대를 아테네로 하여 그리스신화의 영웅 테세우스와 그의 약혼녀인 히폴리테의 결혼식이 임박한 시간으로 가져가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시대가 그리스를 다시 살려내려는 그런 기운이 넘쳐날 때라서 그런 것이었는지, 어찌되었든 신화에서 시작하고 있다. 심리학자인 죠셉 캠불은 '신화는 대중의 꿈이고, 꿈은 개인의 신화'라는 말을 했다. 정말 우리의 꿈이라는 것은 그렇게 신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꿈의 분석에 대한 책을 낸 영국의 융 분석가 Anthony Stevens는 그 책이 계획되고 있는 막바지에서 의미 있는 꿈을 꾼다. 그가 심리학을 배운 두 선생과 흰 코트를 입은 남자 기사가 앞에 놓인 기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을 하는 꿈인데, 그가 보아하니 머리에 붙이는 전극이 있고, 둥근 원통의 종이에 펜이 곡선을 그리는 것으로 뇌파일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를 가르친 한 선생은 그것이 시(詩) 기계라고 하는 꿈이었다. 재미있는 꿈이다.

 필자는 요즈음에는 기억되는 꿈이 별로 없었는데, 여름밤이라서 기억하게 되었는지 하지만 보통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는 그런 꿈을 꾸었는데, 꿈을 적는 버릇이 있어 찬찬히 다시 보게 된 꿈이 있다.

 내가 무슨 일로 어떻게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한 여인 그리고 대학친구와 같이 있는데, 아마도 내가 가자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같이 걸어가는 것인데, 나중에는 계단 같은 것을 걸어 올라가 철탑의 교량 쪽으로 진입했던 것 같고,  올라서서 계속 가려고 했는데, 대학친구가 별로여서인지 그냥 되돌아가려고 하고, 나도 그를 따라서 그냥 돌아서고 있다.  

 이 꿈에서 나온 대학친구는 우리 동창들 중 주도적으로 동창들 일과 사회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친구다. 그리고 나하고는 성격 면에서 그가 외향형이라면 나는 내향형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모임에서도 그렇고 자주 보지만 거리가 있다고 할까, 그런 친구라서 외적 활동에서는 그냥 그를 따라가는 면이 있을 것이다.

 이 꿈에서 내가 그냥 대학친구 '형준'이 하는 대로 되돌아섰다는 것은 내 속에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식의 생활방식이 있다는 것을 꿈이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한 형준은 내가 개발하지 못한 나의 '외향적인 그림자'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림자는 개발하면 나를 어느 상황에서는 잘 도울 수 있는 내 부분 인격으로서 내 전체에 꼭 필요한 것인데, 그것이 열등하기 때문에 잘 드러내지 못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혹 두려워하는 나의 어두운 부분인지도 모른다.

 사실 꿈에 나오는 것은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철탑 너머라는 곳은 사실 <한 여름 밤의 꿈> 연극에서의 요정의 나라 같은 곳으로, 내 의미가 찾아지고 나의 시(詩)적 감성인 '아니마'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내 순례의 영역인 것인데 되돌아선 것인지도 모르며, 또한 꿈에서의 여인이 요정의 무대로 안내할 나의 바로 그 '아니마 감성' 같은 것이었는데, 그 감성을 채 조율하지 못하고 잠에서 깬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꿈에서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우리의 깨어있는 삶에서 이런 것들을 조율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것이 꿈의 형태든 깨어있는 형태이든 현실적이든 신화적이든, 우리가 지각하는 그 열려있는 곳에서의 존재는 우리의 세계가 빛에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여름>에서 신화에 대하여 언급했는데, "신화는 그 자체로서 생명을 지닌 것이 아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그 신화의 부름에 대답하게 되면, 신화는 우리에게 늘 그의 신선한 생명의 물을 제공한다"라고 신화가 우리의 삶에 가져다주는 생명력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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