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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기자들이 기사를 써놓고 마음 편치 않았던 시절이 있었을까. 인터넷에선 기사의 방향부터 내용, 자잘한 팩트까지 실시간으로 독자 반응이 달린다. 조금이라도 틀린 내용을 썼거나, 어떤 목적에 편향돼 있다면 즉각 '기레기'로 분류된다.
 누구나 시를 쓰고, 기사를 쓰는 시대. 시인도 마찬가지다. 대충대충 썼다간, 눈이 높아진 독자들의 혹평을 피해갈 수 없다. 독자에게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기사나 시를 써도 되는 시대는 끝난 것이다.
 오늘만해도 국내 대표 일간지 조선일보의 한 주필이 대우조선해양 비리와 관련해 대가성 기사를 쓰고 금품수수를 한 의혹에 대한 책임으로 사퇴했다. 인터넷에선 해당주필의 지난 행적까지 거론되며 부당권력을 감시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이를 비호했다며, 도대체 참된 언론은 어디에 있냐는 탄식이 쏟아진다. 김영란법에 언론인을 포함시킨 게 잘한 일이라는 반응도 있다.
 물론 이를 청와대와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어쨌든 국내대표 언론 종사자가 누린 특권이 만천하에 고발된 셈 아닌가. 그가 아무리 30여년 간 좋은 기사를 썼다해도 이로써 그는 참된 기자, 언론인의 명예와는 멀어졌다.
 종이시대의 끝머리. 시인과 기자의 처지는 참 닮았다. 오랜 시간 이들이 써온 것엔 분명 소중한 것이 많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쳤지만, 그 소중함을 지키기 위한 일부의 노력은 안일한 것 같다. 좋은 기사와 시로 역량을 증명하지 않는 한, 이름뿐인 둘의 권위는 나락이다.
 물질의 시대, 이들이 해야할 역할은 무엇이고 어떻게 해낼 것인가. 아직 애송이인 기자가 선뜻 답을 내긴 어렵다. 하지만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를 이방인, 주변인으로 규정한데서 대답을 찾는다. 몸을 낮추고 세상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권력과 부에 다가설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들추어 우리 앞에 드러내는 일 말이다.
 얼마전 시집을 낸 엄계옥 시인의 시 '수라'에서도 그 대답을 본다.
 "무지몽매한 내 발목 스친 자리/ 개미 한 마리/ 무너진 어깨 일으켜 세우느라/ 안간힘을 쓴다/ 머리 위에 임금 없고/ 발아래 신하 없는 게 시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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