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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신경과 의사 빅톨 프랭클이 쓴 '의미치료'에 대한 책에 있는 내용으로 오래 전인데, 1970년쯤 미국 대학에서 자살시도를 한 학생들에 대한 보고서에 있는 내용이다. 60명의 자살시도자 중 85%가 '인생이 의미 없이 느껴진다'고 이야기했으며, 이렇게 말한 사람들 중 93%는 사회생활을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었고, 학교 성적이 잘 나오고 있었으며, 가족관계가 좋았다.

    이 보고서를 보고 빅톨 프랭클이 생각한 것은 그들의 고통이 사실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 들리지 않는 외침 같은 것으로, 겉으로는 아무 부족없이 만족하면서 지낼 것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사실 속으로는 사는 것이 의미가 없음에 좌절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좌절이나 고통을 실존 좌절 또는 실존 공허(existential vacuum)라고 이름 붙였는데, 열등감이나 성적 불만이 신경증 원인이었던 것에 비해 삶이 의미 없이 느껴져 병원을 찾게 되는 경우 붙이게 된 용어이다. 미국은 지금도 풍요로운 사회이지만 그때도 풍요로운 사회였다. 당시 한 고등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익명으로 그들이 원하는 어떤 문제나 질문이라도 제시하도록 요구했을 때 약물, 섹스 같은 문제가 나왔지만, 가장 많이 나온 주제는 자살이었다고 한다.

 현대 사회는 예전처럼 본능이나 충동 이런 것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차원, 즉 의미 없음의 고통이 깊어지는 시대이다. 또한 전통이나 전통적 가치에 기댈 수 없이 그런 지침이 없는 것으로 자신이 사실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전통의 사라짐은 젊은이에게서 더 두드러지고, 그래서 그들에게 실존 공허가 더 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빅톨 프랭클은 그러면서 그 시대(today)의 세 가지 '신경증'을 말했데, 자살과 중독 그리고 폭력(aggression) 문제를 들고 있다. 또한 1970년대 한 다른 조사에서, 자살을 시도한 학생들이 인생이 의미 없이 느껴진다고 했던 것처럼, 알코올중독 환자 20명 중 18명이 그들의 존재를 의미 없이 느낀다는 결과가 나온 것을 주목하면서 이 세 가지 문제를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의미의 부재와 많이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의사로서 필자가 느끼기에는 지금 우리 사회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물론 미국의 그때 시대나 사람들의 상황 등이 달라 비교할 수 없는 문제이기는 하여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알코올 중독과 폭력 아동학대 등이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것으로서 똑같은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필자가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분명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생활이 편리하여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때에 비해 자살률이나 중독이 늘어난 것은 프랭클이 본 것처럼 살아갈 의미의 상실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또 다른 것들이 머리를 스치는데 노인인구 증가, 가족제도의 해체 같은 것, 무통분만, 출산율 저하, 그리고 스마트 폰 전국민화 같은 것이 떠오른다.

 그때는 사실 지금처럼 스마트폰에서 게임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보면서 KTX를 타고 가는 청소년을 보았을 때 필자는 '그렇게도 손 가까이 모든 것이 주어져있기 때문에 그만큼 그것에 의존하게 되는 병리도 우리들 깊이 파고들어와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손 안에 모든 것이 금방금방 주어지지 않으면 조그만 좌절도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란 사실은 그렇게 금방 감각에 주어지는, 그런 외양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또한 빅톨 프랭클 말대로 고통에서 발견된 의미는 일과 사랑 같은 성공에서 발견된 의미와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외적으로 어떻게 성공하나, 즉 성공한 비즈니스맨 또는 성공한 플레이 보이가 어떻게 하면 되는가 하는 것을 영리하게 잘 안다. 그런데 어떻게 고통을 참아내는가 하는 것, 고통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성취로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을 아는 것은 다른 좌표에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특성' 강의에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이 빨리 닳아 보이지 않게 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뿐일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여유를 잃고 쫓기고 있다. 내비게이션의 발전으로 그리고 스마트폰의 전국민화로 이젠 전화번호를 수첩에 기록하거나 거리나 주소를 외워야 될 필요성이 사라져 간다.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기계에 의존하는 생활로 되어가고 있다. 중독이란 사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으로의 의존인 면이 있다. 그리고 필자는 우리의 진정한 삶은 이렇게 눈 앞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렇게 시각적인 것으로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경우, 우리의 감성을 스스로 이미지로 바꿀 수 있는 적극적 상상은 퇴화될 수 있는 것이며, 이것도 우리가 서서히 의미를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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