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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윤경화 수필가
2017년 02월 02일 (목) 19:27:46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이월은 가슴이 설레고 조심스럽다. 세상의 기운이 터질듯 차올라 아롱거리며 새부리처럼 도처에 돋아 있기 때문이다. 화사한 햇빛이라도 쏟아지면 삼월이 오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일시에 탄성을 지를 듯이 누리에 팽팽하다.

 가득해야지만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할지라도 이월은 텅 비어 있는 것에서 시작된 충만감을 맛보는 달이다. 출산을 앞둔 만삭의 여인 같은 달이다. 날이 모자라는 달이라 하여 예전엔 혼사도 금했지만, 기실은 만 가지의 꿈과 희망을 영글게 하는 옹골찬 달이다. 일 년 중 이월은 나머지 열 달의 양식이 될 뒤주 같은 달이다.  

 사람과 자연은 나름의 방식으로 겨우내 응축한 힘으로 생의 일 년 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낸다. 그 광경은 참으로 장엄하다. 이월은 그런 힘을 아낌없이 베풀기 시작하는 헌신적인 달이다. 단물나는 가을의 과실이 이월을 잊는다 해도 그리 서운해 하지 않는 아량이 있는 달이다. 

 겨울의 문턱을 막 벗어나 가슴 두근거리는 경계의 달에 서면 겉모습과 다르게 내 안은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발광을 하곤 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기운을 발산하는 여러 가지 행태가 있었는데 주로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개 나른한 사월이 올 무렵이면 증상은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해서 사들인 관련 서적은 삼분의 일 쯤 읽은 것이 태반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책장에서 녀석들을 만나면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다.

 더구나 생면부지인 듯한 낯선 책을 펼쳐 들면 어질더분해진 여백의 풍경은 가관이다. 설익은 해설과 작가에게 약간의 감사의 뜻이나 다른 견해도 적어놓았다. 필체는 분명 내 것이지만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런 행각을 꽤 오래 했던 것 같다. 물론 중간에 색다른 발광도 있었는데 공인중개사 자격시험 공부를 한 흔적이다. 

 나에게 당한 여러 책 중에 이 책이 제일 깨끗했던 것은 그다지 흥미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웃거린 것은 짐작하건대 당시에 자본의 위력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 아니었나 싶다. 내 집 한 칸이 없어 일이 년 간격으로 이사를 하던 시절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그 발광을 두고 그리 황당해할 일만은 아니라고 어설픈 변명을 해본다. 문제는 뱀 꼬리가 되는 나의 뒤끝 때문에 어느 시절도 찬란했던 적이 없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일 년의 양식인 이월을 계획성 없이 써 왔다는 것이다.

 긴 세월에 걸쳐 매년 지급 받은 내 양식을 실속 없이 탕진한 까닭을 이제야 살펴보게 되다니 민망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중심에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나는 그것이 욕심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건강한 욕구라고 우겼다. 욕심의 치명적인 결점은 겸손하지 못하여 한 가지의 일이라도 제대로 하려면 버겁다는 철칙을 가볍게 여겼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남의 떡에 박힌 콩이 커 보여 이것저것 흘끔거리느라 나의 양식은 매년 넉 달 치가 그렇게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인홍 스님은 후학들에게 '중은 신발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내리셨다고 한다. 자신을 낮추어야만 가능한 삶이거늘 어찌 승가에서만 적용될 말인가. 눈에 띄지 않는 일이라도 의미가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던가. 그러나 나와 인연이 닿은 일에 혼신의 정성을 바치는 데 일 년 치 양식을 귀하게 쓰지 못한 어리석음이 있어 나는 늘 아쉬움이 남았던 것이다.

   신발은 밑창이 해져도 나머지 살로 발을 감싸고 보호한다. 불평보다는 온몸으로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하지만 요사이 시끄러운 세상의 소리가 나처럼 남의 밥에 있는 콩을 곁눈질하느라 아우성치며 주어진 양식을 탕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유난히 아팠던 과거의 정유년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의 정유년 또한 파고가 만만하지 않을 듯하니 국민의 한 사람인 나의 허술함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해 자괴감이 든다. 

 나는 많은 시간을 날려버리고 겨우 '글쓰기' 한 가지만 잡고 있다. 이마저도 속이 꽉 찬 남의 글을 부러워하느라 내 글을 많이 외롭게 했다. 이제라도 신발의 정신으로 묵묵히 붓 끝을 살피고 싶다. 펄펄한 이월의 기운을 지혜롭게 잘 써야 할 해인 것 같다. 껄끄러운 문제의 본질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리라.

 2017년의 삼월은 꿈과 희망은 물론 보기 드물게 벅찬 숙제까지 들고 올 것 같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정성을 다하는 삶이 만인을 이롭게 할 신발같이 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만삭인 정유년 이월의 거동에 나는 긴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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