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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향유
최옥연 수필가
2017년 07월 13일 (목) 20:42:56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밭으로 가는 입구에는 오래된 자귀나무가 있다. 아름다운 분홍빛이 전야제의 불꽃놀이처럼 높은 언덕배기에 하늘을 떠받들고 뭉글뭉글 펼쳐져 있다. 구불거리는 오솔길을 오르면 밭 가까이 고샅 같은 굽은 등을 가진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버티고 있다. 그동안 애를 태우다 만난 곳이다. 이처럼 끼워 맞춰진 아름다운 자연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매번 흡족하다.
 가끔은 이 텃밭 하나 가지려고 근교의 그 많은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적막하리만치 고요하던 곳에 풀잎의 작은 떨림으로 이곳에 바람도 있었구나 하는 반가움도 좋다. 꽃과 풀들이 말을 거는 듯한 시간이면 지나간 힘든 날들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만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공기 좋은 곳에 흙을 만지고 푸성귀를 키울 수 있는 작은 공간 하나 마련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 간절함은 더했다. 어느 날은 부동산 소개업자를 따라 몇 시간을 걸쳐 산골 깊숙이 들어가기도 했다. 인적도 없는 첩첩 산중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을 보고 놀란 노루가 갓 나은 새끼를 두고 떠나기도 했다. 어미가 떠난 곳에서 낯선 이방인을 바라보고도 일어서지 못하고 눈만 깜빡이는 새끼 노루를 보는 이색적인 경험도 했다. 세상의 두려움도 모르고 앉아있는 새끼 노루의 눈빛이 예뻐서 넋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 온 적도 있다.

 한 번은 망자들의 땅인 하늘공원을 지나가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더러 유난을 떨었다고 하겠지만 내겐 절실했다. 어떤 때는 여행 가방을 챙겨 경비를 다 지불하고도 떠나지 못했던 적도 있었고, 어느 날은 대부분 암이나 다른 불치병을 앓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깊은 산에 요양을 간 적도 있었다. 비싼 경비를 들였지만 호전되기는 커녕 돈만 날리기도 했다. 수많은 병원을 다녀도 병명도 없이 아프기만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만 지나갔다. 병원에 있으면서도 틈만 나면 머리를 싸매고 나와서는 쓸만한 땅이 있는지 보러 다녔다. 
 무엇이든 때가 있고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땅이나 집이 마음에 들면 환경이 나쁘거나 거리가 멀었다. 어떤 물건은 계약 직전까지 가서도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고생 끝에 마지막으로 본 이 땅을 사게 되었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까이에 있는 산이 연꽃처럼 펼쳐져 있었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다. 주거지와도 가깝고 공기도 좋았다. 무엇이든 이거다 싶으면 가지고 마는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탓에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무작정 집을 담보로 땅을 구입했다.

 십여 년 넘게 묵혀있던 땅은 나무가 자라 산천에 가까웠다. 업자를 불러 굴삭기로 황무지를 갈아 엎고 남편이 경운기로 수차례 밭을 갈았다. 황량한 흙밭에 비닐하우스 두 동을 짓고 주말마다 다녔다. 씨 뿌리고 채소를 키우다가 실패하는가 하면 폭우에 떠내려간 길에 자갈을 붓듯 돈이 들어갔다. 그런데도 우리 부부는 틈만 나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심었다. 종류에 신경 쓰지 않고 씨를 뿌렸던 채소가 자라서 씨앗까지 달고 밭고랑 마다 씨를 뿌리고 뿌리를 내리거나 스스로 꽃밭을 만들었다.
 초봄에 남편이 심었던 옥수수 사이로 콩이 익어가고 있다. 곡식이라는 것은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일이 있어서 한주 건너서 찾아가면 벌써 아무렇게나 자라는 식물들로 밭의 풍경이 달라지고 있었다. 아이들 어릴 때 며칠 저희들 끼리 두고 나들이 다녀 온 것처럼 식물도 두서없이 엉켜서 자라고 있다. 오디 몇 개로 입이 행복해졌다. 새로운 흥밋거리는 치커리 꽃이다. 달맞이를 하느라 밤새 피었다가 해가 중천에 오르면 활짝 피었던 꽃잎을 소리 없이 접는다. 그것들의 자태를 보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 앙증맞은 꽃을 보기 위해 아침이슬이 가기도 전에 가끔 밭으로 간다. 노란 해바라기 사이에서 어여쁜 꽃을 피우고 있는 치커리 가까이 가면 그 속에도 붕붕거리며 제법 시끄럽다. 벌들의 축제가 한창인 것이다. 이슬 머금은 치커리 꽃이 탐스럽다.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던 덕분에 눈이 호사를 누리는 시간이다.

 내게는 아침 축제다. 덩달아 눈이 예뻐지고 머리가 맑아진다. 나풀거리는 나비까지 몇 마리 거느리고 나면 벌이 들려주는 음악이 있고 나비가 추는 춤이 있다. 그들의 아름다운 배경에는 흐드러지게 핀 보랏빛 작은 꽃과 키 큰 노란 국화가 조화롭다. 밭 둘레에 쳐진 주변의 푸른 산은 계절마다 열두 폭 한국화를 펼쳐놓은 듯하다. 나는 가만히 그것들이 들려주는 공연을 듣거나 보다가 눈을 감기도 한다. 그 순간은 어떤 것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냥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감사한 일이다. 다만 자연에서 오는 그 아름다운 순간을 혼자 즐기기가 아쉽다.
 우리가 한 것이라고는 발품 팔고 빚 얹어 마련한 밭에 씨를 뿌리고 물을 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작물들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감힘을 다 쓴 것 같았다. 야속한 가뭄이 계속 되어도 무늬만 채소처럼 떡잎을 달다가 흘러내리는가 하면 꽃과 작은 열매를 달기도 했다. 기대 이상으로 자연이 주는 것들을 많이 누리고 있는 것 같다. 먼 산에서는 까마귀 소리도 들리고 앞산에서는 뻐꾸기 소리가 난다. 가뭄 속에서 애처롭게 자라다가 멈춘 깻잎이 화답으로 어깨춤을 춘다. 고요하던 바람이 흥을 일깨우는지 바람 따라 와서 터를 잡은 식물도 몸을 떤다. 그것들이 어우러져 춤사위가 벌어진 것을 보면 아마도 텃밭 향연의 절정이 될 듯하다. 

 가끔은 산에도 낯선 손님들이 찾아온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좋은 놈도 오고 그렇지 않은 놈도 온다. 좋은 소리는 오래 들었음 하고 시끄럽고 듣기 거북한 소리의 주인공은 빨리 떠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속에 나는 한 때라도 좋은 사람이었는지 돌이켜 본다. 나도 누군가에게 빨리 떠났으면 하는 불청객은 아니었는지 생각해본다. 어쩌면 그들에게 아직은 나 또한 낯선 객인지도 모른다. 멀지 않은 날에는 이곳에서 자연스레 어울리는 시간이 오리라.
 어쩐지 오늘은 주변에서 아름다운 소리들만 들리는 듯하다. 아니면 내가 객이 되는 마음이라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객이든 주인이든 텃밭 향연은 천천히 오래도록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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