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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았다. 홀연히 우편배달 되어 온 화사한 여성잡지다. 이 가뭄의 무더위를 뚫고 달려온 빗줄기 같이 싱그럽다. 남편의 직장동료였던 K씨가 보낸 것이다. 삼십 몇 년 전의 푸르렀던 우리의 세월도 청아한 샘물처럼 담겨와 찰랑인다.

 결혼 2년 만에 내 집 마련을 한 연립주택 단지에서 만난 K씨 부부다. 4년쯤 이웃으로 살며 두 가족이 곧잘 모여서 놀기도 하고 토요일 저녁과 일요일이면 K씨가 슬리퍼를 끌고 남편한테 놀러왔다. 말 수가 적은 편인 두 사람이었지만 같은 직장의 공통화제로 커피를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거기에 콩나물이 있다.

 계획보다 앞당겨서 집을 장만하느라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갚는 일에 여념이 없던 터이다 보니 가계경제 긴축을 해야 했다. 변변찮은 내 음식솜씨도 더해져서 만만한 게 콩나물이었다. 툭하면 콩나물국을 끓였다. 콩나물국과 두부, 계란찜, 김과 김치, 구운 생선 토막이 우리 집 밥상의 대부분이었다. 겨우 그런 상차림으로, 끼니때에 닿게 되면 남편과 담소하고 있는 K씨한테 식사를 권했다. 예의 바른 K씨는 늘 사양을 해서 그 콩나물국 식사를 한 적은 몇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고도 그 추억이 잊히지 않는 것 같다. 때때로 선물을 보내온다. 이번에는 일 년간의 잡지구독 선물이다. 콩나물이 세월을 타넘고 선물을 데려온 것이다.

 몇 푼 들어있지 않은 얇은 지갑을 들고 시장에 가면 손쉽게 사는 것이 콩나물이다. 콩나물공장에서 나온 콩나물 통이 시장 곳곳에 자리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의 반찬거리로 나앉아 있는 것이다. 콩나물이 고급 한식 식당에 나오는 적 있던가. 고등어조림 같은 것이 주 메뉴인 서민 식당에 별 양념 없이 대충 무쳐져 반찬 가짓수의 구색으로 나오는 것이 콩나물이다. 1920년대 잡지 '별건곤'에 전주의 명물로 콩나물국밥이 나온다. 전주 대표 음식, 탁백이국이라 불렸던 콩나물국밥은 그때에도 서민들이 쉽게 배고픔을 면할 수 있는 '콩나물음식'이었다. K씨가 보낸 잡지를 펼쳐본다. 유기농 채소 광고에 가지가 온 몸에 물방울을 묻히고 싱싱하게 채반에 담겨 있지만 비타민 풍부한 콩나물은 잡지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받침대에 올려놓고 물을 주는 콩나물시루는 다락방 같다. 콩나물은 다락방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흔한 흙 한줌 가지려 하지 않는다. 땅 한 뼘에라도 뿌리를 내려 제 영역을 만드는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제 곁의 무엇에도 애착할 줄 모른다.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뿐, 부어주는 물줄기도 그냥 흘려보내고 찾아든 햇빛도 원하지 않아 떠나보낸다. 제 것으로 거머잡지 않고 스쳐 지나가도록 놓아둔다. 깊은 절 누각 위에 고요히 앉은 고승의 마음 가운데가 저럴까 싶다. 그러고도 오롯이 제 몸을 일구어 허허로움 뒤의 실함을 오붓이 내보인다.

 균등을, 어울려 함께 사는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콩나물보다 더한 무엇이 또 있을까. 시루 속에서 서로에게 힘껏 공간을 내어주고 빈틈없이 빼곡하게 둘러서서 싫은 기색 없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 제 몸부터 살찌우려고 동족을 젖혀버리지 않는다. 물 한 모금씩 받아먹으며 서로 돋우어 같이 자라서 몸피와 키 들이 균일하게 일정하다.

 콩나물이 제일로 여기는 건 깨끗함이다. 하루에 몇 번이고 목욕을 하고 싶어 한다. 매일 몇 차례씩 퍼부어 주는 물을 원하는 건 유기물을 씻어내기 위함이다. 청결 하나만 지켜주면 기꺼이 만족해서 희고 고운 몸을 키워낸다. 제 정결함으로 사람의 뇌까지 깨끗이 한다. 사람 뇌 속이 깨끗하려면 위장이 깨끗해야 한다. 섭취한 콩나물이 위 벽에 붙어 있는 음식 찌꺼기를 떼어내는 역할을 한다. 위가 청소되면 따라서 뇌가 말끔해지는데 도움 된다고 한다.

 콩나물은 정확하다. 콩이 조금만 썩거나 쭉정이어도 눈을 틔우지 않는다. 콩인 채로 일 년을 지나고 나면 겉모습은 말짱하지만 속내는 부실해졌다고 싹을 밀어 올리지 않는다. 할머니는 등잔을 당겨 놓고 상 위에서 좋은 콩을 골랐다. 세심한 손길로 차분히 고른 콩을 시루에 안쳤다. 콩나물을 키우는 방도 언제나 정갈하게 했다. 기름 한 방울도 튀어 들어가면 콩나물은 속절없이 썩어버린다. 바지런히 물을 주어 곱고 연한 콩나물을 길러내어 그 시절의 사계절 채소로 식구들 건강을 챙겼다.

 물을 줄 때는 콩나물시루 밑의 자배기 물을 떠서 부어주는 동작을 여러 번 할수록 콩나물이 좋아한다. 자분자분 물을 주고 있노라면 어느 새 콩나물을 닮아간 마음이 가지런하고 다보록해지곤 한다.
 잘게 토막 낸 고등어를 노릇하게 구워 갖은 양념과 넣고 졸인 콩나물장조림은 우리 집 밥상의 인기 메뉴다. 콩나물의 머리와 발을 말쑥하게 따고 식용유에 볶아 겨자 곁들인 초간장소스에 찍어 먹으면 매력적인 반찬으로 거듭나 있다.

 콩나물국 식탁으로 민망해 할 줄도 모른 채 식사를 권한 나를 K씨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것 같다. 정의감이 강하고 순박한 그는 세월이 흘러도 콩나물처럼 맑은 심성이 그대로여서일 것이다. K씨는 파가 둥둥 떠 있던, 그 콩나물국에 들어서서 삶의 아름다운 쉼표 하나씩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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