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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의 이슬비가 온 산과 들을 분단장을 시켰다. 차창 밖의 산야가 곱디고운 새색시의 자태와 흡사하다. 실바람이 봄을 한껏 몰고 와 그 향기에 진취해질 때 동해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산봉우리는 하늘을 따라잡을 듯 구름 위에 솟아있다. 크나큰 바위는 어느 큰 회사에 파업할 때 쭉 늘어선 노조원들의 모습같이 일렬로 빙 둘러섰다. 녹음방초는 기지개를 켜면서 저마다의 동색에 자지러졌다.

 물행주질을 한 것 같은 하늘은 더 높고 부는 바람은 거칠 것이 없어 차창에 부딪힌다. 상큼한 공기마저 가두어 둘 데가 없으니 붙잡지도 못하겠다. 길이 없이도 잘 떠다니는 구름처럼 내 몸도 어느새 강원도를 향해 날았다.

 어느 샌가 영월이다. 서강이 흐르는 청령포다. 비단같이 휘감기는 오월의 훈풍에도 마음만은 겨울 찬비를 맞은 느낌이다. 강가에 뒹구는 돌멩이도 눈물을 흘리다 말라버린 듯 얼룩이 번져 있다. 강물은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이 서글픈지 몸을 일렁거리다가 목쉰 소리를 내며 흐른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였으며 뒤쪽은 험준한 암벽이 가로막혀 있어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곳이다. 섬 아닌 섬이다. 작은 배로 유배지로 들어가니 어린 단종이 머문 작은 어소가 눈길을 고정시킨다. 영월호장 엄흥도가 단종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옆으로 문안을 드리는 것을 재현해 놓았다. 영월호장의 마음이 읽힌다. 꽃잎에 새긴 사랑은 꽃이 지면 시들고, 하늘에 새긴 사랑은 비가 오면 지워지지만, 그가 새긴 사랑은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지워지지 않고 도드라져 보인다. 

 뒤로 돌아가니 단종이 유배 생활을 할 때 소나무 아래서 앉아 쉬었다는 관음 송이란 나무가 있다. 높은 키로 자라 낮은 어소를 지키듯 내려다보고 섰다. 엄전한 나무의 모습이 관음보살님처럼 보인다. 그래서 관음송이란 이름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600년의 지난한 일을 머금은 채 나무는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섰을 뿐이다. 애틋함을 보아서인지 아니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앓이를 한 탓인지, 신록의 계절인데도 밑 부분의 잔가지가 불그스레한 빛을 띠었다. 관음 송은 그 붉디붉은 잎을 진한 눈물처럼 뚝뚝 떨구고 있다.

 관음송을 지나자, 북쪽을 향한 언덕에 돌탑이 보인다. 단종이 두고 온 부인을 그리며 서울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던 강가언덕이다. 여기 오를 때마다 막돌을 주워 모아 쌓은 망향탑이라고 한다. 돌탑은 시간을 멈춘 듯 긴 세월이 지났어도 변화무상함이 없건만, 인간사는 왜 그렇지 못할까.

 십 칠 세의 꽃봉오리가 김도 나지 않는 하얀 증발이었다. 바람같이 가버린…. 어쩌면 너무 아려서 그 김조차도 고운 무색이었을까. 그 김을 대변하듯 바로 옆에는 흰 찔레꽃이 군데군데 피어올라 있다. 영혼이나마 죽어서 왕이 되고 왕비가 된 것을 기뻐했을까. 죽은 뒤에 노산군이면 뭣하며 단종이 되면 뭐가 달라지냐고 반문을 했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소용돌이를 쳐야 하는가. 생존이 공존하는 세상에는 어디나 마찬가지일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인간사는 왜 그렇게 되는 걸까. 보편타당성 있는 척도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끝은 언제일까. 아직도 이런 비극이 심심찮게 전개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 안타깝다. 돌아보면 인간사란 생자필멸이고 만상허상인 것을.

 산 중턱의 찔레꽃들이 한이 쓰린 넋인 듯, 하얀 꽃잎이 해거늘 맞바람에 가늘게 떨린다. 꽃들의 세계에는 아픔이 없을까. 저 세계에는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젖는 사이 어느덧 하늘에는 얼레빗 같은 반달이 떴다.

 어둠이 짙어온다. 하늘에 뜬 별이 슬픔의 빛을 섬세하게 품고 인간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다. 청령포를 껴안은 서강은 눈물 젖은 별을 수심 위에 띄우고 굽이굽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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