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일월 중순 포항 죽도시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사람들은 활어센터의 즐비한 수족관 앞에서 취향에 따라 횟감을 주문한 후에 미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보이지 않는 안이 궁금했다. 남편은 우리도 들어가 보자는 표정이다. 횟감을 주문하고 앞 사람들을 따라 현관이랄 것도 없는 공간에서 신발을 벗고 경계표시만 시늉한 문지방을 넘으니 방이다.

 한 평 남짓한 방에 두 줄의 앉은뱅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열서너 명쯤 되는 이방인들이 따개비처럼 앉아 있다. 단순하고 순진무구해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다가 아니듯이 때로는 의외로 단순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조금은 거칠고 건조한 말투의 경상도 아지매는 포항 죽도시장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서빙'을 하고 있었다. 남편과 내 앞에 날아오다 급히 착지를 하듯 물수건과 컵이 놓여진다. 옆 사람과는 방석이 거의 닿아 있다. 공연히 외투를 무릎에 올렸다 바닥에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 애를 썼다.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내 사정과는 무관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에 빠져 있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얻는 행복감도 크다고 한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홀가분함이 즐거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걷기와 이야기, 놀기와 먹기는 여행이 주는 즐거움의 중요한 요소다. 방안의 사람들은 선물 같은 순간을 향유하고 있다. 서둘러 분위기에 섞이고 싶었지만 그 일이 쉽지 않아 관찰자가 된다. 손님들의 대화 내용으로 봐서 여행 중에 죽도시장의 다양한 해물을 맛보기 위해 들어온 것 같았다. 내 옆에 앉은 네댓 사람은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다. 물회와 대게 등 몇 가지의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쭉하고 투박한 사투리에 진한 정이 묻어 있었다. 장소가 만들어주는 친밀감 때문인지 서로에게 건네는 속정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졌다.

 소박한 공간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자유에도 후하다. 활달한 목소리부터 기운이 다르다. "여기 쥐약 하나요." 주문을 하자마자 말보다 행동이 빠른 아지매가 날듯이 소주 한 병을 가져다 놓는다. 남자는 무척 즐거운 듯 연신 '쥐약'은 털어 넣고 강원도산 말은 뱉어낸다. 쥐약이 섞인 남자의 기분은 점점 기화해 그의 언어를 태우고 떠다니느라 온 방 안이 웅성거렸다. 나는 쥐약이 소주의 은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죽음이 연상되는 말이지만 분위기에 따라 자유의 발로인 위트가 되다니.

 앞쪽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서울여자가 앉아 있다. 집밥이 그리운지 저울에 달아 먹듯 식사를 하며 포항과 불국사 간의 거리를 묻는다. 길 떠난 지 꽤 된 듯 염색한 머리는 바래고 행색이 남루하다. 온몸에서 회귀의 본능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녀 옆에 앉은 사람들은 식사가 끝나 자리에서 뜰 준비를 하고 있다. 모두 한 가족인 듯하다. 대개 그러하듯이 가족 중에 유난히 셈이 밝아 헤픈 씀씀이를 조절해 주는 사람도 있다. 이 댁에도 야무지게 보이는 젊은 여성이 계산대 앞에 섰다. "밥 그거 언제 했능교? 밥알이 하나도 안 퍼졌데요. 굳어서 맛도 없데예. 밥값은 빼야겠어요." 포항 특유의 억양으로 "그 밥 어제 해놨는 건데예." 서빙하던 아지매의 진솔한 대답에 방 안의 활기는 순간 정지 상태다. 그 와중에도 서울여자의 순발력이 놀랍다. 새 밥 나오면 남은 밥과 바꿔 달라고 했다. "할인은 안 되는데예. 새 밥은 알았심더." 상황을 단호하고 간단하게 정리했다. 멈추었던 영상이 흐르듯 어색하던 공간에 다시 자유로움이 넘친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뜻하지 않게 이방인이 어우러져 점심 한 끼 하기엔 더없이 매력적인 장소다.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유라고 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일한다. 그리고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찾는데 그 중 여행도 있다. 모두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그렇지만 막상 누리는 듯 하지만 과시에 빠지는 경우도 있으며 부자유를 경험하기도 한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비싸고 근사한 레스토랑이라도 때로는 과시와 부자유가 짝패가 되어 허영심을 부추긴다. 그래서 코르셋 같은 식사 예절에 길들여지지 않으면 부자유와 불편을 돈으로 사는 격이 될 때도 있다.

 그에 비하면 보카치오가 쓰지 않았지만 여행 중 골방에서 현대판 데카메론 한 편에 출연하는 경험은 구미가 당기고도 여유가 있는 일이 아닌가.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처럼 누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그만이다. 부담 없는 대화와 느슨한 식사가 있어 모두 행복하지만 안이 잘 보이지 않는 곳. 어제 지은 밥을 내고도 당당한 주인을 당연히 용서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는 곳. 내가 만났던 방백의 묘미에 빠지듯이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