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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쪄낸 송편을 덥석 베어 물었다. 베어 문 떡이 너무 뜨거워 얼결에 꿀떡 삼켜버렸다. 타는 불덩이 하나가 서서히 아래로 훑어 내려간다. 가슴을 치며 찬 물 한 사발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움이 누그러지자 눈물이 찔끔, 한 숨이 휴 나왔다. 정신이 들고서야 후딱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을라나 돌아보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추석 며칠 앞두고 종숙모님이 선물 받았다며 얼마간 나누어 준 옛날 송편. 맛도 만들던 기억도 아물해진 옛날 떡을 맛보려다 일어난 해프닝이다. 기계로 만들든 손으로 만들든 옛 송편이든 요즘 송편이든 송편 맛이야 어디 가랴만 공연히 고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법석을 떤 탓이다. 민망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급히 삼키느라 제대로 맛보지 못한 송편을 다시 집어 들었다. 익숙하고 정겹고 넉넉한 맛이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 '노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떡 줄 놈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떡에 관한 이런 익숙한 속담과 함께 우리는 살아왔다. 생활 속에서 생겨난 속담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떡이 우리 가까이 있고 흔했다는 뜻인데, 요즘 사람들은 떡을 점점 멀리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손이 많이 가고, 쉬 변하는 성질을 가진 떡이 빵에 밀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차 떡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고 서운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떡의 종류가 참 많았다. 행사 때 최우선으로 준비하고 정성을 들였던 것은 떡이었다. 단점은 손이 많이 가는 것과 보관의 어려움일 것이라 본다. 그러니 제삿날이 되면 당일에 집안 새댁들이 둘러앉아 떡을 치고 빚고 찌고 종일 매달렸다. 만들고 가벼이 쪄내는 것은 젊은이들이 하지만 시루에 안치는 역할은 가장 경력이 넉넉한 안어른들이 맡았다.

 겨울 제사 때는 고물 떡이 주로 만들어졌다. 편기 가장 아래에는 기본으로 본편을 괴었다, 겨울에는 거피한 강낭콩 하얀 고물을, 봄엔 햇쑥이 들어간 느티고물 본편을 괴었다. 그 위에 채 인절미를 얹는데, 채 인절미는 파랑, 하양, 노랑 고물을 입혔고, 거피 참깨, 검정깨 고물을 썼다. 낱 인절미도 색색 콩고물과 색색 참깨, 대추 채 밤 채를 묻힌 잡과편이, 찹쌀에 녹두소를 넣고 뭉쳤다가 얇게 썬 곶감을 넣은 부편을 괴었다. 우리 어머니는 유독 개쑥떡을 좋아 하였는데. 개쑥이 날 때 떡을 해 먹기도 했고, 쑥이랑 함께 말려 보관했다가 이듬해 영등 때 찰떡과 같이 고물에 묻혀 내었다. 가끔씩 소나무 껍질을 벗겨 며칠이고 물에 우려 떫은맛을 뺀 송기를 삶아 쌀과 찧어 송기송편을 자그맣게 빚어 올렸다. 송기송편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떡이었으나 우리 마을에서는 귀한 편이었다. 그리고 봄 미나리 잎, 가을 국화와 국화잎, 곶감 대추 석이로 장식한 화전이 네 귀퉁이에 몇 겹 얹히었고, 그 위에 주악을 얹었다. 대충 일곱 여덟 가지 많으면 열 가지 넘는 떡이 제사 편기에 괴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봄이면 애쑥을 뜯어 견과와 녹두 섞은 소를 넣은 쑥꾸리를, 조그맣게 네 귀를 집어 올렸고, 햇쑥 송편이 오르기도 했다. 

 여름 제사에는 잘 쉬는 고물 없는 떡, 백편 증편 절편 송편이 주로 놓였다. 어머니는 음력 유월에 드는 할아버지 제사에 떡을 많이 하여 나누어 먹었다. 하얀 백설기 모양으로 석이와 검정 깨 거피 참깨와 대추로 고명을 놓기도 했고, 집 둘레에 기자를 심어 기자 잎으로 알록달록 장식하기도 하였다. 요즘 말하는 기정떡이다. 감잎에 망개떡처럼 싸서 낱 증편을 내놓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하고는 지금까지도 별로 친하지 않는 떡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시송편. 우리 집에서 빚던 모시 송편은 자그맣고, 색깔도 녹색이라기보다 오히려 검정에 가까웠다. 개쑥이나 쑥, 송기 같은 것은 절구에 찧어 결이 살아 씹히는 맛이 지금의 송편과는 다른 맛이었다. 옛날식으로 절구에 찧어 빚은 거친 듯 쫄깃한 송기송편, 모시송편이 그립다.

 가을, 제사 때는 봄과 별반 다름이 없지만, 추석에는 송편과 증편이 만들어졌다. 송편은 대충 찧은 팥소를 넣은 손바닥만 한 둥근 송편과 반달 모양의 송편이었다. 어떤 집에서는 커다랗게 빚어 위에 손가락을 꾹 눌러 찌는 집도 있었고, 통 풋콩을 소로 넣어 찌는 집도 있었다.

 고사 때는 팥 시루떡을, 묘사 때는 본편과 찰떡과 절편을 주로 썼고, 집집이 나누어 먹었다. 행사가 없는 무심 때는 찰밥을 차지게 해서 주걱으로 문질러 떡을 만들고, 팥을 삶아 함지에 담아 먹을 때마다 고물을 묻혀 먹는 주걱 떡이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주로 긴긴 겨울밤을 나기 위한 군입질거리거나 손님이 올 때 손쉽게 만들어 대접했다.

 그리고 설날 떡은 찰떡 종류와 가래떡이다. 가래떡을 우리는 골미라 했고, 이보다 더 인기가 있는 것은 찹쌀가루 반죽으로 가마솥에 커다랗게 구워낸 찹쌀고지다. 떡국에 골미를 넣어 끓이지만, 여기에 찹쌀고지를 넣어 끓이면 별미다. 겨울엔 화로에 말랑말랑하게 구워 먹던 찰떡에 대한 그리움과 냉장고 없던 시절이라 곰팡내 나고 쉰내 나는 떡을 먹어야 했던 기억도 만만찮다.

 옛날 송편 하나로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 어린 시절 떡을 더듬어보았다.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떡도 있을 것이다. 떡도 그립고 떡을 만들던 사람들과 떡을 나누어 먹던 모두가 다 그립다. 머잖아 박물관에 가서나 옛날 떡을 구경할 날이 오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넉넉한 송편 하나를 집어 든다. 그리움과 아쉬움이 입 안 가득 씹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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