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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공무도하가

박해성

강바닥 물풀같이 흔들리며 살던 사람
그까짓 파도 몇 잎 잠재울 줄 왜 몰라서
끊어진 그물코 사이 등 푸른 날 다 놓치고

주거부정 지천명에 비틀대던 아수라도
가슴속 천둥 번개 훌훌 털어 버렸는가
동지冬至에 언 발을 끌고 살얼음 강 건너시네

가지 마오 공무도하, 머리 풀고 우는 바람
타는 놀빛 만다라를 수평선에 걸어놓고
어디로 흘러갔을까, 비명을 삼킨 강물은

지친 새 추락하듯 쭉정별 지는 이 밤
그 누가 추운 강변 아직도 서성이는지
손톱을 잘근거린다, 빈처 같은 조각달이

△ 박해성: 동아일보신춘문예 당선 (2010), 시집 '비빔밥에 관한 미시적 계보', '루머처럼, 유머처럼'등, 천강문학상 시조 대상(2012) 외

 

이서원 시인
이서원 시인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공타하사(公墮河死) 당내공하(當柰公何)
"임아,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이 그예 물을 건너네. 물에 빠져 죽으니 이제 임은 어이할꼬"
원본에서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다. 공후를 타며 슬픈 죽음을 애도하는 여옥의 마음이 지금도 아련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백수광부(白首狂夫)는 그 때 이미 물에 빠져 죽었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그때와 다르지 않게 신백수광부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유야 다르겠지만 "물풀처럼 흔들리며" 사는 이가 어디 한 둘인가.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가장의 책무는 더욱 힘겨워지는 현실이다. 하여, "그까짓 파도 몇 잎 잠재울 줄 왜 몰라서"라고 했지만 실은 이것은 역설이다. 진즉 몰라서 모르겠는가. 짚을 수 있는 꼬챙이 하나라도 있어야 무릎을 세울 수 있는 게 지금의 참살이다. 대형마트가 골목 상권을 접수하고, 비정규직이 난무하고, 복지국가의 요원한 메아리만 양산되는 요지부동의 오늘을 어찌 자신의 못난 탓으로만 치부할 수 있으랴!
강물은 '만절필동'처럼 하염없이 흐르고 있다. 동지에 살얼음만 얼었으니 어찌 강을 건널 수 있겠는가. 기어이 신백수광부는 강을 건너고 있다. 분명 살얼음은 깨질 것이고 그는 빠져 목숨을 잃을 게 뻔하다. 누가 손을 내밀어 따뜻하게 잡아주리오. 누가 저를 안고 다독여주리오. 끝내 우리는 공범이 되었고 비명을 삼킨 강물은 여지없이 평온하게 시대의 순명처럼 흐르고만 있다.


그러나 아직도 "추운 강변에서 서성이"며 "빈처 같은 조각달이"뜬 하늘을 바라보는 이, 곧 "손톱을 잘근거"리며 오늘 밤 한 시대의 울분을 함께 넘는 이야 말로 진정한 동반자가 아닐는지.
시인의 '新공무도하가'는 단순한 현실을 노래하는 것에만 국한되는 게 결코 아니다. 수많은 도랑물이 모여 큰 강물이 되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듯이 "가지마오"의 애절한 절규가 모여 큰 함성이 되고 그제야 비정규직이 사라지고, 균형 잡힌 복지와 골목상권이 살아나는 확장성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그의 시가 섬뜩하게 시대를 향해 외치는 진정성은 결코 연목구어(緣木求魚)로만 산화(散花)해지지는 않으리라 확신한다.  이서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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