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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냉전의 유산인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대결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평화의 시대의 문을 열게 될 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2018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기자가 가 본 판문점은 긴장된 마음과는 달리 겉으론 평온한 분위기였다. 판문점은 남북 분단을 의미하듯 두개의 주소를 갖고 있다.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어룡리와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이다.

판문점은 원래 남측과 북측이 함께 경비를 섰지만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 이후 대치 상태로 바뀌었다. 마주 보고 서 있지만 서로 말을 걸 수도 없고 넘어 갈 수도 없다.
판문점은 4·27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장소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북정상회담 사무국 프레스 등록에 34개국 38개언론사 3,000여명의 취재진이 참여했다.
남북 정상이 회담 후 합의문을 발표하면 '판문점 선언'으로 불릴 가능성이 크다.

판문점은 6·25 전쟁 전에는 초가집 몇 채만 있는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의 시골 마을이었다. 널빤지로 이뤄진 문짝과 다리가 있다는 뜻의 '널문리'라고 불렸던 마을이다.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열리면서 이 마을의 작은 상점 앞에 회담장이 마련됐는데, 중국군이 이 '널문리 가게'를 한자로 판문점(板門店)으로 표기해 그대로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점(店)은 가게 또는 주막이 있었다고 해서 붙였다. 휴전회담을 마친 뒤에는 정전협정 조인을 위해 인근에 목조건물을 지었고, 이후 1km 남쪽의 현재 위치로 옮겼다. 그리고 1953년 10월,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령부 측과 공산 측(북한·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해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가 설치됐다.

우리측 지역에는 정상회담이 열리는 평화의 집과 자유의 집이 있고 공동경비구역 중심에 7개의 단층 건물이 동서로 늘어서 있다. 회담장 안에 놓인 회의용 탁자는 평범한 테이블처럼 보이지만 군사분계선(MDL)에 의해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분단의 비극은 테이블마저 분할하고 있다.
지금 리모델링이 마무리 중인 평화의 집은 2018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우리 정부가 1989년 12월 19일 준공했다. 총 3층 석조건물로 1층에 기자실과 귀빈실이 있고 2층은 회담장과 남북회담 대표 대기실, 3층은 대회의실과 연회실이다.
JSA구역 정면 가운데에 있는 우리측 자유의 집은 1998년 7월 9일 연건평 1,437평의 4층 건물로 새로 지었다. 1층은 로비와 기자실및 편의시설, 2층은 사무실·회의실·대기실, 3층은 남북 연락사무소·남북 적십자 연락사무소·대회의실, 4층은 전망대와 다용도 공간으로 구성돼 있다.
JSA 북쪽의 판문각은 북한군 판문점 대표부가 들어서 있다.
통일각은 평화의 집에 대응해 북한이 1992년 준공한 연건평 460평의 지하1층 지상 1층 건물로 북한은 이 곳에 남북 연락사무소를 두며 접촉 장소로 삼고 있다. 2018 남북정상회담 실무회담이 통일각에서 열렸다.

판문점을 거친 주요 사건으로는 소련 관광 안내원 마투조크 귀순(1984년 11월 23일), 임수경 학생·문규현 신부 판문점 귀환(1989년 8월 15일),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판문점 경유 방북·귀환(1994년 6월 15일~6월 18일), 정주영 전 현대회장의 소떼 1,001마리 인솔 방북(1998년 6월 16일·1998년 10월 27일) 등이 있다.
지난해 11월 13일 북한 병사 오청성의 귀순도 판문점을 통해서였다. 그는 판문점을 넘어 귀순하다 이를 저지하려는 북한 육군 병력의 총격을 받은 채 우리 군에 구조됐다.
오청성은 11월 13일 오후 3시경 지프를 몰고 72시간의 다리를 건너 회담장 근처 초소 인근까지 접근했다. 하지만 지프 바퀴가 도랑에 빠지자 차에서 내려 남쪽을 향해 뛰는 과정에서 북한 경비병의 사격에 총상을 입고 우리군에 구출됐다.  서울=김잠출기자 usm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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