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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내원궁 앞에 섰을 때부터 번민의 연속이었다. 인솔도우미가 찬 시멘트 바닥에 깔아 둔 얇은 돗자리 위로 신발을 벗고 올라서라 했다. 내 발을 들여놓고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두 손을 합장한 이들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신발을 벗고 내 옆으로 발을 들여 놓으라고 눈짓을 해도 괜찮다고 보살 미소를 지었다.

연분홍 봄날의 바람기 같은
상춘객의 공염불
문득 돌아보는 뒤늦은 후회에
그날 영 헛불공만은 아닌듯


그때, 두 손을 합장한 채 안도하는 내 욕심을 읽었다. 그녀가 올라섰더라면 신발을 벗은 상태로 세멘트바닥으로 비켜선 내 발이 시릴 것에 대한 안도였다. 암자 왼쪽의 깊은 골짜기로부터 불어오는 세칼바람이 소소리바람을 밀어 기분 좋은 시린 감으로 피부를 훑는가 했더니 허튼 생각 말고 제대로 정진하란 듯 왜바람이 되어 머리카락을 헝클어 놓았다. 

내 소원도 접어 두고, 인솔 스님의 목탁소리 강구기도 게을리 하고, 지장보살을 암송하는 도반들을 생각했다. 저들은 무엇을 빌까. 내원궁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구원한다는데 어느 조상님이 지옥에 가 계신지도 모를뿐더러 안다 해도 다 구원해 달라고 짐을 지우기가 죄송스러웠다. 그저 다리 성성해서 장장 다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좁은 돌계단을 걸어올라 금동지장보살을 모셔놨다는 내원궁 앞에 설 수 있게 해 준 시간에 대해 감사의 합장을 할뿐이었다.

가족의 안위 역시 지금처럼 탈 없이 살게 해 주신다면 좋겠고, 앞으로도 변함없는 바른 마음으로 두루 무난하기를 바란다고, 차마 부탁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소심함을 보고하듯 어물쩡하게 마무리를 했다. 세기의 어느 명 작가가 '꽃은 덧없기에 아름다우며 황금은 변함이 없기에 따분하다'고 했던가? 근 한 시간이 지나도록 지칠 줄 모르고 불경 '지장보살'을 암송하는 그 시간이 점점 따분해져 공염불만 했다.


이름 모를 새 떼가 한바탕 날아가더니 그제야 스님은 몇 마디나마 내가 알아들을 소리로 축원을 했다. 모월 모일 모 곳에서 온 신도들의 간절한 소원을 대신해 일일이 나열한 축원이었다. 소원성취, 학업성취, 만사형통, 가정평화, 업장소멸… 부처님 머리가 지끈지끈했을 거다. 나로서는 들어도 모를 불경을 외듯, 불가능한 인간 세상의 욕망을 흘려놓았다.


휘늘어진 솔가지와 솟아오른 신도들의 머리통 사이로 보인 파란 하늘의 조화에 눈길과 생각이 머물렀다. 내원궁 기와지붕 위에 푸른 솔가지들은 아래로 휘늘어지고, 내 앞 높은 제단 위에서 두 손 모은 신도들의 까만 머리는 기와지붕보다 솟아올라 보였다. 자신을 낮추느라 법문을 듣고 있었지만, 몸은 그보다 많은 욕심을 갖고 사는 현실과 닮아 있었다.


회고하는 데는 언제나 가을이 제격이라더니 가을 아닌 봄이 오는 길목이라 그랬을까, 불공보다 잿밥인 주위 풍경에 마음을 온통 뺏겼다. 그때만큼은 시리도록 눈부신 푸른 하늘 아래서 보드라운 봄바람과 목탁 소리와 만나는 그곳이 지상 낙원인 듯했다.


이른 봄날, 모처럼 먼 길 나서서 찾은 선운사 뒤 동백꽃은커녕, 숲도 못 보고 시주 대신 하려던 기와 불사 시주도 못했다. 신심 없이 따라나선 길이라 인솔한 스님의 장삼 끝에 달린 바람 끄트머리에라도 스칠까 염려되어 일행의 꼬리에만 붙어 다녔는데 끝내 외상 불공을 드리고 온 셈이다.


외상을 하려 해서 한 게 아니다. 자유시간을 준다며 경내의 법당을 다 돌고 삼삼오오 사진도 찍으라 했다. 시간이 널널하다싶어 만세루 옆에 비치된 기와 불사에 동참하려고 매직펜을 잡았다. 기와 한 장을 놓고 펜에 힘을 들이려 할 때 도반중의 총무가 펜을 뺏어 책상 위에 두고 팔목을 잡아끌었다. 불심 더 깊을 그녀나, 들뜬 마음만 데리고 온 나나 몸만 벙개벙개 온 건지 봄날 봄바람에 취하니 다 헛짓인 모양새다.

절복을 입고 그 자리를 지키던 신도가 볼 세라 등 뒤가 켕겼지만, 부처님은 또 내 사정을 익히 다 아시려니 하고 나왔다. 사정이 되는 대로, 내 마음이 하라는 대로 해도 부처님은 다 이해하고 포용하신다며 편치 못한 마음을 부처님 탓으로 돌렸다. 언젠가 들었던 '마음이 곧 부처'라 했던 법문의 꼬리를 잡고 억지를 부렸다.


하기야 내가 부처라 해도 영악한 미물인 인간들의 술속에 속는 척할 뿐, 법당문 돌쩌귀가 닳도록 드나드는 군상들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을 터다. 부처인 자신을 믿는 신도도 아니면서, 주체할 수 없는 연분홍빛 봄날의 바람기를 발산하려, 사찰 순례 길에 덩달아 나서 공염불만 하고 갈 상춘객인 줄 익히 알고 있었으리라.


그날을 되돌아보면 허락된 염불 장소에까지 가서 공염불만 하고 온 것에 대해 뉘우치는 나를 보고 있자니 헛불공만 드리고 온 건 아닌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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