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못 다 부른 그 노래
아직도 못 다 부른 그 노래
  • 울산신문
  • 승인 2018.09.12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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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두 시인·소설가

울산 중구 북정동 동헌 앞 광장에 '타향살이'노래비가 서 있다. 내가 울산예총을 이끌 때 시작한 고복수가요제의 일환으로 세웠던 비다. 나는 이 곳을 자주 지나치며 고향의 선배 예술인을 다시 새기게 되지만 잊지 못할 또 한분의 예술인을 그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어 더욱 노래비에 대한 애정을 놓지 못하는 것이다. 그 예술인이 바로 타향살이를 작곡한 손목인 선생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타향살이 외에도 '목포의 눈물' '짝사랑' 등 대중가요 1,000여곡을 작곡한 한국가요사에 별처럼 빛나는 인물이다. 타향살이는 손목인이 스무두살로 일본 동경 음악학교에 유학하던 그 해 여름방학에 잠시 귀국해 OK레코드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이 회사 문예부장 김능인의 작사에 곡을 부쳐 신인 가수 고복수가 취입한 노래였다. 처음엔 곡명이 타향이던 것을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다시 곡명을 타향살이로 바꾼 노래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효시를 동학도의 노래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로 한다면 1895년경에 불려진 타향살이는 100년의 역사가 되고 한국가요의 전 역사가 된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는 창가라하여 유행가, 예술가곡, 동요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일본과는 다르게 외국 곡에 가사를 번안하거나 새로 지어 부친 것이 대부분이었다. 유행가가 창가에서 시작한 무렵인 1927년에 이르러서야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대중가요인 '강남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낙화유수가 나왔다. 본격적인 대중가요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황성옛터'가 레코드로 팔리게 된 것은 1932년으로 손목인이 스무살때였다.

그 이후 우리의 가요사를 정리한 저서가 여러편 나왔으나 거의 대동소이한 내용으로 채워져있었다. 그러다가 재일교포 박찬호씨가 일본어로 저술한 '한국가요사'는 많은 전문가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곧 한국어본으로 나온바있다. 여기에 저자인 박찬호씨가 한국 대중가요의 황금기는 타향살이가 불러지면서였다고 써놓았다. 그만큼 손목인 작곡의 고복수 노래는 한국가요사에서 금자탑으로 남아있게 되었으니 실로 울산의 후배 예술인들은 크나큰 자긍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의 어느해 나는 고복수가요제를 개최하면서 손목인과 이난영 그리고 특별상을 수상했던 이미자를 동헌 앞 노래비로 안내한 적이 있었다. 그때 손목인은 고복수의 초상을 보고 감격하며 나를 붙들고 말했다. "어떻게 잠자는 고복수를 깨울 생각을 했소! 사실이지 타향살이는 그냥 뜻없이 불러서는 안되는 노래요! 김구 선생도 이승만 대통령도 못한 일을 고복수가 해낸거란 말이오! 하는 말에 이난영이 아니요! 고 선생님이 아니라 손목인 선생이 해낸게지요! 하고 받아넘겼다. 그 말 끝에는 손목인이 소리내어 울고 이난영도 울고 나도 울고 말았다.

그렇다. 타향살이는 그런 노래다. 어느 정치가 독립운동가가 나라 잃고 기약 없는 유랑길에 오르던 겨레의 한을 그 노래만큼 달래줄 수 있었던가? 또한 타향살이는 그 시절 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몸 속에 녹아있는 천금을 주고도 못 살 우리의 노래다. 

광복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민족은 이산되고 산업화 되면서 인구는 도시로 몰리고 해외로 이민을 가기도 하며 타향에서의 외로운 삶은 자꾸만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타향인이다. 이 타향인들의 망향을 달래주는 영원한 명약인 타향살이는 그래서 우리 울산의 자긍심이다. 작곡가 손목인은 팔순 기념으로 자서전 못다부른 타향살이를 내고는 1992년 5월 서울 롯데 호텔에서 팔순잔치를 가졌다. 가요계 후배들이 그의 히트 곡을 부르며 노 예술인을 위로하는 잔치가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또 눈물을 흘리며 거듭거듭 후배들에게 대중가요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것을 당부했다. 그 뜻을 이어받아 울산에서도 고복수의 후배들이 해마다 알뜰히 빈틈없이 고복수 가요제를 가진다. 

오는 15일이 그 날이다. 나는 후배 예술인들이 자랑스럽다. 돌아보면 고복수가요제는 울산 예술인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행사였다. 예총을 창립하고나서 한푼도 지원을 받지 못하고 행사를 치를 때 예우들이 모여앉아 푸념만 늘어놓던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주머니를 털어 십시일반 모아야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대중가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싸늘한 눈빛이 가슴 아팠다. 딴따라나 부르는 노래 그렇게 인식해버리는 것이 나로서는 가장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문화예술이 그런 것이 아니다. 대중가요나 순수음악이 공존하면서 발전해야한다는 것이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예술인들의 생각이었다. 그럴 때 커다란 힘이 되어준 은인이 있었다. 그 분이 이석호 전 울산상의 회장이다. 어느해 종하체육관에서 가요제를 열고 있을 때 였다. 이석호 회장이 이재덕 사장을 이끌다시피 하여 행사장에 왔었다. 행사를 마치고 시청으로 걸어가면서 이재덕 시장이 나에게 말했다. 수원서 흥난파가요제를 많이 도와줬는데 여기서는 고복수 가요제가 되었군요 하면서 격려해주었다. 같이 걸어가던 이석호 회장이 선뜻 지원하겠다고 하여 그해는 무사히 마쳤지만 그때를 계기로 시에서도 해마다 행사비를 지원해준 기억이 살아있다.

후배 예우들이여. 대개 예술인은 탄신 100주년을 기념한다. 지나쳐버린 고복수의 탄신 100주년이지만 다음해부터는 전국민이 불러도 불러도 못 다 부르는 노래 타향살이의 고복수 가요제가 되도록 꾸며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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