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의자
  • 울산신문
  • 승인 2018.09.13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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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숙 시인

야산 기슭에 버려진 의자를 보았다. 1인용 갈색 비닐 소파인데 등받이 부분은 비닐이 뜯어져 스펀지가 비어져 나오고, 앉는 자리는 꽤 오래 사용한 듯 푹 꺼져 있다. 그런 의자가 잡목과 잡풀 사이에 버려져 있는 것이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내다 버린 현장이지만 쓰레기 불법 투기라는 환경론적 측면보다는, 저것은 의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감정적 씁쓸함이 더 컸다.

오래 사용한 물건, 특히 앉는 곳이 꺼질 정도로 오래 사용한 의자라면 버릴 때(이 정도로 주인에게 봉사한 물건이라면 버린다는 표현보다는 헤어진다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좀 더 품위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함께 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의자의 몸체를 천천히 쓸어보고 마음속으로 안녕을 고한 뒤, 정해진 장소에 조심스레 가져다 놓아야 할 것이다. 의자는 그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삶의 무게 고스란히 견디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의자
그 고마움 자연만이 먼저 알고
노란 마타리꽃이 곁에 기댔다


무릇 의자란 앉기 위해 고안된 가구이다. 앉는 것은 선 것과 누운 것의 중간 형태이다. 서 있는 것이 청년의 자세라면 눕는 것은 노년 이후의 자세일 것이다. 앉는 것은 고된 노동과 풍파를 견뎌낸 장년의 자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의자에 깊숙이 앉아 휴식을 취할 때 거기에는 몸의 무게 외에 그 사람의 삶의 무게까지 더해진다.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서 노인이 된 소년에게 그루터기를 의자 삼아 내준 나무는 소년의 무게 외에 소년이 지나온 삶의 온갖 격랑과 희로애락의 무게까지 감내할 것이다.

며칠 전 배달된 문예지에는 권덕하 시인의 '파랑대문 옆 의자'란 시가 수록되었는데, 거기에 "의자가 서 있다"란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다. "의자가 서 있다 /한 번 앉아본 적 없는 의자는 /누군가 앉았던 그대로, /파랑대문 옆에 서 있다" 의자는 서있는가? 사실 '의자가 서 있다'란 표현은 조금 낯설다. 길쭉한 모양새 때문에 전봇대가 서 있다, 바지랑대가 서 있다, 가로등이 서 있다란 표현은 사용하는 편이지만, 의자가 서 있다니? 하지만 의자엔 '다리'가 있으니 서 있든 앉아 있든 하긴 할 것이다. 그리고 앉아 있는 것보단 서 있는 것이 의자의 역할에 더 부합될 것이다.

사람이 그 의자 위에 앉으면 그 사람을 묵묵히 받치며 서 있는 의자. 설령 비어 있을 때라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종일 서 있는 의자. 그래서 의자하면 휴식이나 푸근함과 아울러 희생과 베풂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쨌든 사람은 의자에 앉고 의자는 그 사람의 무게를 고스란히 받으며 견딘다. 

내가 의자에 앉아 본 것은 물론 학교에 입학하면서이다. 마루 끝에 앉듯 걸터앉아서 두발을 까불거릴 수 있는 의자는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래서 의자를 만들어 달라고 아버지를 조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각목을 구해다 다듬고 못질을 해서 작은 의자를 하나 만들어 주셨다. 그런데 당시 책상은 앉은뱅이 책상이라 의자와 짝이 맞지 않았다. 더구나 고등학교 시험을 앞둔 큰오빠 것이라서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처럼 책상과 의자를 갖추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숙제며 공부를 하리라는 기대를 접고, 의자를 처마 밑에 두고 무시로 앉거나 학교놀이 같은 걸 하는 데 사용했다. 종종 거스러미가 손톱 밑을 찌르고 고르게 박히지 못한 못이 치마를 찢기도 했지만, 그 의자는 불쏘시개가 될 때까지 꽤 오래 우리 집에 있었다. 의자는 나무로 깎은 팽이, 방패연, 새총, 썰매 등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다른 것들과 더불어 어린 시절을 추억할 때 떠오르는 그립고 중요한 물건이다.

어린 시절 의자에 관한 추억 때문인지 나는 베라 B. 윌리엄스가 지은 『엄마의 의자』라는 그림책을 아주 좋아한다.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는 엄마를 위해 온 식구가 유리병에 동전을 모아 의자를 사는 이야기이다. 유리병에 돈이 가득 찬 날, 엄마와 딸은 장미 꽃무늬의 멋지고 푸근한 의자를 사온다. 그 의자에 앉아 엄마는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기도 하고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이웃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휴식, 연민, 사랑 같은 의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따뜻한 그림책이다. 

'의자'라는 시로 유명한 이정록 시인도 어머니의 입을 빌어 우리에게 말한다.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사는 게 별 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이렇게 기껍고 고마운 의자를, 그것도 오래 사용해서 반질반질 길이 들고 손때가 묻어 식구처럼 다정했을 의자를 야산 기슭에 함부로 버려두다니, 무슨 짐짝 치우듯 팽개쳐두다니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다행히 의자의 고마움은 자연이 먼저 알았다. 의자 발치에 노란 마타리꽃이 피어 의자에 기대 있다. 마타리꽃은 의자의 의자 같다. 의자는 마타리꽃의 의자 같다. 의자끼리 서로 의자를 받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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